진정한 쉼,
더 이상의 선물이 없다
봉화 축서사 조실 무여 스님
글. 박사 사진. 하지권
칠정례가 길게 길게 이어진다. 낮고 느린 합송은 끝날 기미가 없다. 따라하려 하니 폐활량이 적은 탓에 소리는 가늘게 이어지다 이내 끊어지고 만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소리가 끊어진 그곳에서 간절한 마음이 차오른다. 법당에 가득한 이들도 그럴까. 길고 느린 소리가 반들반들한 마룻바닥에 낮게 깔리고, 소리를 따라서 내 몸도 자꾸만 낮아진다. 엎드려 좌복에 이마를 대고 간절한 마음을 지켜본다. 합송은 끝날 듯 끝나지 않고, 해는 뜰 기색이 없다.
불교의 예법을 잘 모르더라도 앞자리에 앉은 스님의 등을 바라보며 따라 절하다 보면 어느샌가 예불시간이 끝나기 마련이다. 그리 길지 않으니, 꾸벅꾸벅 몇 번 절하고 나면 곧 헤어질 시간이 된다. 예불의 몸통이 되는 칠정례는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로 시작하는 예경문이 일곱 번 반복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헤아려 지심귀명례가 일곱번쯤 나왔구나 하면 곧 끝난다는 이야기다.
그런 칠정례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리게, 느리게 이어진다.
축서사의 새벽예불은 3시다. 그리고 반드시 참가해야 한다. 축서사 템플스테이는 “쉬고, 쉬고 또 쉰다”는 것을 강조하는 터라, 세시에 예불을 꼭 드리러 나오라는 말은 사실 뜻밖이었다. 절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새벽예불은 선택사항이다.
바쁘게 사느라 잠이 부족한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온전히 쉴 수 있도록 꿀맛같은 아침잠을 헤아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축서사 조실 무여 스님의 뜻을 받들어 ‘쉼’을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새벽예불은 반드시 참석하라고 강조하다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예불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 오는 길에 문득 깨닫는다. 축서사에서 강조하는‘쉼’은 ‘꿀맛같은 아침잠’ 같은 것이 아니구나. 침대와 혼연일체가 된다고 쉴 수 있는 게 아니구나.
그렇다면 무여 스님이 “철저하게 쉬어라”며 강조하시는 ‘쉼’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쉴 수 있는 것일까. 스님께 드린 첫 번째 질문이었다.
쉰다는 것의 의미
“사실 쉰다는 말이 쉬우면서도 아주 어려워요. 참으로 쉴 줄 알면 부처님이라.”
다를 줄은 알았지만, 그토록 어려운 것이었다니.
“보통 사람들은 쉰다고 하지만 그냥 형식적으로 흉내내는 거거든. 그러니까 진정한 쉼이 못 되는 거예요. 온갖 고뇌망상 다 피우면서 하려니까 어렵다, 괴롭다, 힘드시다, 별말을 다들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쉼이란 어떤 것일까? 스님의 답은 간명했다.
“수행 자체가 쉬는 방법이에요.”
금방 와 닿는 말은 아니다. 불교의 수행이라 하면 어쩐지 용맹정진(勇猛精進), 면벽수도(面壁修道),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은산철벽(銀山鐵壁) 같은 단어들이 먼저 떠오른다. 오랜 시간을 저린 다리 견뎌가며 좌복에 가부좌로 버티고, 뼈만 남은 부처님 그림을 올려다보며 욕망을 참는것이 수행 아니던가. 그 지난하고 괴로운 과정을 거쳐야 부처님의 경지 근처라도 갈 수 있는 것 아니던가. 그러나 무여 스님의 해석은 다르다.
“부처님 당시 여러 제자님들이 부처님 한 마디에 바로 깨치셨어요. 그분들은 평상시에 마음이 상당히 쉬어진 분들이라. 자연스럽게, 쉰다는 생각없이, 편안하게 무난하게 쉬신 분들이 선지식이래요. 그렇게 쉴 수 없으니까 부득이하게 화두다, 염불이다 하면서 방법을 삼아 쉬려는 거지요.”
그렇다면 겨우 1박2일, 바쁜 틈에 짬을 내어 축서사까지 올라와 하룻밤 자고 가는 사람은 어떻게 쉬어야 하는 것일까.
“시내에서 아주 부지런히 사시고 복잡다단하게 사시는 분은 여기 오시면 하룻밤 푹 주무시라고 그래. 처음부터 쉬기도 어려워요. 일정한 코스나 과정을 거치면 좋겠지만, 일단 푹 쉬면 근본 생각이 좀 변해요. 자기 근본을 나름대로 생각하고 볼수도 있어요. 요즘 사람들 참 지혜롭잖아요. 똑똑하시고. 그러니 나름대로 보이는 게 있어요.”
그렇다면 절에서의 하룻밤은 ‘쉼의 첫걸음’ 쯤 되겠다.
“사실 절이 그간 우리 불교인에게는 대단한 역할을 했지만 세속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산중의 조용한 절간에 지나지 않았어요. 별로 큰 일을 못 했거든요. 그런데 템플스테이가 문을 열어주고 눈을 뜨게 했지.”
무엇이든 시작이 있어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사실 절에서의 하룻밤이 그저 하룻밤만은 아니다.
스님 말씀대로 “이 길 뿐이다, 이건 안 할 수 없다, 안하면 자기 손해다”라고 여기며 수행을 향해 내딛는 마음. 그 첫 단추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절이 세속인에게 문을 여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이리라.
자신을 향한 자비와 대분심
절에서 하룻밤 지내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무엇이 보일까.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것은 타인에 대한 분노와 자기자신에 대한 혐오 아닐까. ‘심리적 내전 상태’라는 표현까지 나올 정도로 각박한 사회, 다툼과 혐오가 만연한 도시에 있다가 겨우 하룻밤 절에 온다고 그 영향에서 금방 자유로 워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타인을 탓하는 것은 독이지만, 타인을 탓하지 않으려고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도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스스로를 너그럽게 대하는 ‘자기자비’가 중요한 개념으로 떠오른 것은 남이든 나든 누구든 탓할 수밖에 없는 좁고 메마른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높은 자살율이 그 결과다.
무여 스님은 쉼을 강조하는 한편 참선수행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세 가지 요소,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憤心), 대의심(大疑心)’을 권한다.
큰 분노인 ‘대분심’이 마음에 걸린다. 타인에 대한 분노는 마음의 독이 되지만 나태한 자신에 대한 분노는 수행을 이끌 에너지가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대분심’과 ‘자기자비’는 어떻게 만나는 것일까?
“첫째는 신심을 내고 둘째는 분심을 내라, 그리고 의심을 일으키라는 것은 참선자들의 일반적인 이야기에요. 한 700~800년 전에 고봉선사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누누이 하신 말씀이거든. 분심이란 ‘나는 왜 공부가 안 되나, 역대 조사와 천하 선지식, 수많은 분들이 공부를 잘해서 깨쳐서 대도인이 되고 인류의 큰 스승이 됐는데 나는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못나서 화두 하나 제대로 안 되느냐’고 하면서 자기를 질책하고 호되게 꾸중하는 거지요. 그렇게 하면 정신을 좀 차리게 되고 안할 수 없고, 이 공부를 꼭 해야겠다는 그런 마음을 갖고 더 열심히 하고 잘하게 되거든.
현대적인 방법은 자기를 사랑하고 자신의 약점이나 단점을 좋게 생각한다기 보다는 ‘그런 약점 단점이 있으니 이 답답한 사람아, 참으로 공부를 해야 되지 않느냐’면서 어린애 다루듯이 자기를 잘 다루어서 더 열심히 하고 더 애쓰게 하는 것이잖아요.
사실은 두 가지가 같은 내용이에요. 다만 그 형식이 다르고 표현이 다를 뿐이에요. 고봉 스님 말씀은 참선하는 분, 발심한 분들이 공부를 더 잘하도록 상당히 고차원적인 면에서 하신 말씀이고, 후자는 세상의 일반적인 이야기예요. 그러니 후자의 이야기가 요즘 사람이나 앞으로의 사람들에게는 더 맞을지도 모르지. 이 두 가지는 양립할 필요가 있어요.”
문득 궁금해졌다. 스님도 수행 과정에서 대분심이 많은 도움이 되었을까?
“처음에는 분심이라는 말이 이해가 잘 안 되었어요. 자세하게 따져보고 이해 하려고 애쓰고 어떤 것은 외우듯이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하니까 내게 좀 쏙 들어왔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과정이 좀 걸렸습니다.”
큰스님의 겸손한 말씀을 들으니 그것이 ‘대분심’에 해당하는 것만은 아님을 알겠다. ‘대신심’과‘대의심’, 더 나아가 부처님의 가르침 모두에 해당하는 이야기일 터. 하나하나 삶과 수행에 적용해보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끝을 본 스승님의 말씀이라,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아려진다.
화가 사라진 자리를 묻다
그렇다면, 지금의 스님은 어떨까? 여전히 ‘대분심’을 느끼실까? 한결같은 미소를 띄고 아이에게 하듯, 그러나 정중하고 친절하게 답해주시는 스님이 화를 내는 모습은 상상이 잘 안 된다. 스님도 희로애락(喜怒哀樂)이라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이실까? 수행을 오래 하면 감정에 휘둘리는 일은 사라질까?
“수행을 하면, 예를 들어 화두 수행을 하다가 진정한 의정(義淨)이 나서 순일한 상태가 되면 마음이 그렇게 고요하고 편안해. 거기서 조금 더 들어가면 성성적적(惺惺寂寂)한 상태가 됩니다. 그런 상태가 되면 참으로 묘한, 말이나 글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을 느낍니다. 그 기분이 수행에서 느끼는 진정한 행복이에요. 그런 상태가 되면 감정의 기복이 다 없어지는 거야.
그런 상태가 되고 나면 ‘화’라는 것 자체가 없어져요. 내가 가진 사전에서는 화라는 말이 그날부터 없어지는 거야. 그게 수행이라는 겁니다. 누구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화를 불끈불끈 내고, 그런 보통 사람으로서의 못난 심성 자체가 다 없어지지.”
그렇다면 화를 전혀 안 내시는지, 짖궂게 한번 더여쭙자 스님은 장난스럽게 눈을 빛내신다.
“화도 진심에서 우러나는 화가 있고, 애들 못난짓 하면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참 못난 놈이라고 꾸중하는 화가 있잖아. 그 결이 다르지. 그렇게 하는 경우는 있어요. 그래야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하니까. 때로는 화를 내는 연기를 하고 그래.”
스승이란 그런 걸까. 여일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을 생각하시는구나, 싶다. 지금도 스님은 축서사에 와서 뵙기를 청하는 사람들에게 매주 일정한 날 친견시간을 열어두고 있다.
그렇게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온통 들여서 수행의 정도와 직업, 나이 상관없이 다양한 많은 이들에게 귀 기울이고 그들에게 도움이 될 길을 찾아주신다.
수행법, 더 이상의 선물이 없다
무여 스님을 뵈러 올라가기 전 만나 뵌 또다른 스님이 귀뜸해 주셨다. 큰스님 뵙고 법문 듣고 간 사람들은 다들 너무나 만족스러워한다고.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문제를 들고 와 펼쳐 놓을텐데 그들 하나하나에게 필요한 말씀을 해주실 수 있다니. 부처님은 응병여약(應病與藥)의 천재였다는데, 부처님의 길을 따르다 보면 그런 것도 닮게 되는 것일까?
“같은 말이라도 사람마다 잘 받아들이는 분이 있고 오해하는 분도 있어요.
그 사람에게 맞는 얘기를 해줘야지, 그렇지 않으면 별 도움도 안 되고 그냥 바짓가랑이만 왔다 가는 식이지. 그래서 여기까지 오신 분에게는 한 소리 제대로 들어서 변화를 일으키고 잘 살아가게 되는 변곡점이 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도록 해주려고 애를 씁니다.
어른이 어린애들을 보면 애들끼리 싸움질도 하고 치고받기도 하는 게 밉게 보이지는 않잖아. 그냥 편안하게 무심하게 가르쳐주고 이끌어주지.
부처님 당시에, 다니시면서 포교하실 때 전혀 모르는 사람하고도 지나가다가 몇 마디 하면 바로 제자가 되고 스님이 됐어요. 몇 마디만 해도 이내 교화가 돼. 이게 부처님이 아니더라도 도가 높고 수행이 좀 깊은 분은 비슷하지 않을까 해요.”
오는 사람들은 다양하고 내어놓는 답도 그에 맞게 다양하지만, 그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알려주는 것은 호흡법이다.
“난 여기 오시는 분들에게 어떤 분이든 부처님 당시의 수행법인 호흡법을 꼭 가르쳐 주려고 하지.
호흡법을 꾸준하게 못하더라도 일단 가르쳐주는 것만으로 큰 뜻이 있어요. 인연은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려워. 그러나 꾸준하게 가르쳐주다 보면 좋은 사람들은 따라오고 부득이하면 그걸로 끝내고 합니다. 수행은 하라마라 할 필요가 없어요. 누구나 해야 되고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이 수행이라.
안 하면 자기 손해야. 그래서 수행법은 하든 안 하든 누구에게나 가르쳐주지. 더 이상의 선물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는 분에게 수행법은 반드시 가르쳐주고 있어요.”
그러면서 자세부터 호흡하는 법, 그리고 그 효과까지 자상하게 말씀해주신다.
“부처님의 지혜는 태양에 비유합니다. 보통 사람의 지혜는 반딧불에 비유해요. 반딧불하고 태양하고 게임이 돼요? 상대가 안 되지. 수행을 해 보면 본인이 다 느껴요. 안 하면 자기 손해라.”
인터뷰가 끝나고 장지문을 여니 비의 기세가 한창이다. 잠시 비구경하고 섰더니 무여 스님의 마른 손이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신다. 문득 새벽 예불이 다시 생각났다. 예불이 끝나고 모두 흩어질 때, 입구 한쪽에 서서 오랫동안 무여 스님이 절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목탁의 박자와 상관없이 마치 눈앞에 부처님을 모신 듯 간절하게, 깊고 평화롭게 절하는 모습을 보며,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더랬다.
생각에 빠진 내 등을 무여 스님의 손이 토닥이신다. 그 손은 말하는 듯 했다. 방법이 있다,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다고.
박사 북칼럼니스트. ‘불교덕후’로도 유명하다. 방송과 일간지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책과 문화를 소개해 왔으며, ‘책 듣는 밤’ ‘책 듣는 저녁’으로 대중과 만났다. 『나에게, 여행을』, 『가꾼다는 것』, 『치킨에 다리가 하나여도 웃을 수 있다면』 등을 썼다.
문수산 축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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