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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의 숲에도 새겨진
간벌의 상처

사찰과 더불어 회복하는
치유의 여정

희양산 봉암사

글. 홍석환 사진. 하지권

“산판, 봉암사 산판이 얼마나 좋으냐 말입니다. 산림계, 군, 도 경찰서, 본산, 종무원, 총무원으로 해서 짜고는 봉암사 산판 베껴 먹으려고 자꾸 산판(사업)을 하자 합니다. 한번은 한 40~50명이 트럭으로 막 왔어요. 협박을 할 참이라, 산판(사업) 하자고. 큰 방에 모두 앉혀놓고 쭈욱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봉암사에 그냥 이렇게 사는 것 같아도 앞으로 큰 수도원을 세울 것인데 집을 지으려면 이 나무들이 다 쓰일 터이니 산판을 할 수 없다고. 그랬더니 도의 산림국장이라는 사람이 ‘스님들이 그런 좋은 이상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든지 봉암사 산판은 책임지고 못 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했어요. 도 산림국장이 책임지고 산판 막겠다고 하니 딴 사람들은 아무 말도 못하지!”

(1982, 성철 스님 구술 기록)

수행자들이 지켜냈던 봉암사 숲

1982년은 봉암사가 특별수도원으로 제정된 해다. 성철 스님께서 결사 당시를 회고하며 봉암사 숲을 언급한 기록을 확인한 후, 부랴부랴 일제강점기 때 작성된 지도를 찾았다. 이 지도는 우리나라 산에서 숲이 어떠한 상태인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지도로, 봉암사를 둘러싼 희양산의 숲을 확인할 수 있는 문경 일대의 지도는 1916년 제작됐다. 역시나 봉암사 입구에서부터 희양산 일대는 모두 큰 나무들이 그대로 자라고 있는 성목림으로 형성돼 있었다. 봉암사 입구 바깥으로 대부분의 산이, 벌목된 이후 아직 회복되지 않은 무립목지인 것과 확연하게 대비를 이룬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마자 일본은 우리나라 숲에 대한 전수조사를 빠르게 진행했다. 당시 조사에 의하면 남한지역의 숲 가운데 큰 나무들이 자라는 숲은 겨우 10%를 조금 넘었고, 90% 가까운 숲은 큰 나무가 없는 벌거숭이 산이거나 벌목 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어린나무들이 자라는 숲이었다. 조선 후기까지 유지됐던 10% 남짓한 숲 또한 대부분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베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해방 이후인 1940년대 말, 대규모 면적의 숲이 베어지지 않고 유지된 봉암사 숲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원시림을 유지하던 곳이었을 것이다.

실제 지도를 통해 당시 숲의 구성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봉암사를 둘러싸는 숲 대부분이 활엽수 숲으로 유지되고 있었으며(아마도 졸참나무와 느티나무가 주된 수종이었을 것이다), 봉암사 뒤편 능선 너머, 봉암사에서는 보이지 않는 희양산 동사면 급경사 지역 일부에 침엽수림이 분포하고 있었다(침엽수림은 소나무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만큼 봉암사 숲의 산판은 말 그대로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업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산판을 완강하게 거절한 성철 스님의 말씀이 주는 의미는 크다. 우리나라 거의 대부분 숲의 나무들이 벌목된 조선 후기에도, 그리고 일제의 원시림 수탈이 체계적으로 이어졌던 일제강점기에도 봉암사를 둘러싼 숲이 온전히 보존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숲은 곧 가람이었으니, 부처님의 뜻으로 살고자 했던 결사의 의미를 가득 담은 그런 숲이었을 것이리라.

봉암사 ‘특별’수도원. 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희양산의 숲은, 불자라면(아니 불자가 아니라도, 숲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속 한 곳에서 동경의 마음을 품고 삶의 어느 한순간, 한 번쯤은 방문하기를 바라는 그런 숲이 아닐 수 없다.
허락된 자만이 들어갈 수 있고, 수행할 수 있는 곳.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결사의 숲.
1년에 오직 하루, 부처님오신날에만 그 공간을 대중에 허하는 곳, 봉암사를 품은 희양산의 깊은 숲.
궁금해 마지않았던 그 숲으로 조심스레 발을 디뎌본다.

사찰도 숲에 깃든 일부

한여름을 알리는 장마가 시작될 즈음, 하늘에 검은 구름이 드리운 풍광만으로도 잔뜩 긴장되는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발을 디딘 봉암사. 전날 내린비로 더 커졌을 계곡의 물소리는 찾는 이로 하여금 긴장을 늦추지 않게 하는 듯했고, 대낮에도 검은 먹구름이 하늘 전체를 가리운 탓에 더욱 조심스런 산문이었다. 그러나 수행에 방해만 될 불청객을 종무소 앞까지 미리 나오셔서 반겨주시는 주지 진범 스님과 산감 동광 스님의 맑은 미소에 잔뜩 조여왔던 긴장은 자연스레 해제되었다. 백두산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이어져 내려오는 기운이 거대한 화강암봉인 희양산에서 우뚝 멈춰 선 기세를 그대로 이어받은 곳에 봉암사가 앉아 있다.
수도자에게 숲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문에 대한 주지스님의 현답이 돌아온다.

“숲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수행 그 자체지요.
(수행자의) 삶 그 자체니까 우리가 무슨 숲에서 뭘 얻는다 이런 게 어디 있겠어요? 우리가 숲의 일부니까 사찰이 숲인 것이지요. 숲과 사찰을 따로 떼놓고 보면 별개로 보일지는 몰라도 숲 자체가 사찰이고, 사찰 자체가 숲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이 사실은 이 숲에 고스란히 남아있고, 우리 생활이에요. 숲을 지금 막 특별하게 생각하려 하는데, 사실은 그런 건 아니고, 있는 그대로예요. 바꿔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자체가 사실은 숲이다, 이 말이지요.”

주지스님의 현답을 받아 들고, 우리를 안내해 주실 산감 동광 스님과 함께 ‘있는 그대로’, ‘삶 그 자체’의 숲으로 들어간다.



산행길은 경내를 벗어나 지름티재로 올라간 후, 백두대간 주능선 북쪽에 위치한 희양산 방향이 아닌, 주능선 남쪽 방향으로 틀어오르는 길이다. 희양산 맞은편에서 봉암사와 희양산이 절묘하게 연결되는 모습을 조망할 수 있는 구왕봉을 고점으로, 백두대간 주능선을 따라 남하하며 주치봉으로, 다시 호리골재와 은티재를 지난 후에, 백두대간 주능선을 벗어나 잣밭재골을 따라 다시 봉암사로 내려오는 길이다. 두 시간이면 된다는 주지스님의 말씀을 농으로 돌리고, 아침 일찍 출발해 해가 지기 전에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며 산행은 시작되었다. 동광 스님은 일상답게 힘들이지 않으면서 희양산과 봉암사의 모습을 모두 눈으로 담을 수 있는 곳을 능숙하게 걸으며 안내해 주셨다. 불청객으로서 받을 수 없는 최고의 환대가 아닐 수 없다.
경내를 벗어나 계곡을 따라 조금 걸어 올라가면 마애미륵여래좌상이 계곡변 나무들 사이로 눈에 들어온다. 합장하며 오늘의 산행을 알리고 발걸음을 옮긴다.
본격적인 숲을 느끼는 시간이 된 것이다.

동광 스님은 지난해 태백산 도솔암에서 뵌 인연이 있었기에, 도솔암의 이후 소식과 함께 숲에 대해 더 편안하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도솔암 바로 뒤편으로 송전탑이 계획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산을 올랐을 때, 빈 몸으로도 오르기 힘든 도솔암에 태양광 판넬을 지게에 지고 올라 조립하시던 스님께서 이제는 봉암사의 산감으로 다시 한번 연이 닿게 된 것이다. 수행처의 훼손을 막고자 고군분투하던 스님은 숲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소임인 듯 기쁘게 산감의 역할을 하고 계셨지만, 산행 내내 도솔암의 문제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며 깊은 걱정이 떠나지 않는 듯했다. 매일 산을 오르면서 스님은 온전한 자연을 그렇게 받아들이며 때로는 근심을, 때로는 평온을 이어가고 계셨다.

“지금도 숲을 잘 모르지만, 예전에는 정말 숲의 의미를 몰랐어요. 제가 어릴 때부터 산속에서 살았음에도 정작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던 거지요. 이제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숲의 의미를 더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산을 닮고 싶어지고, 또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산이 품고 있는 생명의 가치를 하루하루 늘 배우는 거예요. 가까이에서 함께 있으니까.”

특별한 숲에 들어선 직후, 그 이전까지 꽉 들어찼던 들뜬 마음은 고요함이 아닌, 두 가지 요인에 의해 불안함과 불편함으로 변했다. 산행 내내 마음 한 켠을 억누르던 정신적 산란함은 산행을 힘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물론 우리나라의 다른 일반적 숲들과 비교하면 더없이 훌륭한 숲이었지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숲은 수행 자체’라는 의미를 담은 숲으로 마음속 기대가 컸던 터라 그 기대를 충족하기에는 아무래도 한참 부족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부분 숲의 나무 높이가 15m 전후로 자라는 데 비해, 이곳 봉암사 숲은 암산이라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20m를 훌쩍 넘기면서 곧고 높게 자란 나무들이 숲을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온전하지 못한, 불안정한 숲이었기에 느껴지는 답답함은 어쩔 수 없었다.

입산금지 중에도 벌목은 진행돼

곧고 높게 뻗어 올라간 나무들은 자연 스스로 그러한 것이 아닌, 사람의 간섭에 의해 단순한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서는 졸참나무가 비교적 많이 보였지만, 일제강점기 때의 지도에서 보여 주었던 활엽수들을 대신한 소나무가 많았고, 사면이 급해지면서는 굴참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해발800m에 가까워지자 신갈나무가 자라는 숲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숲을 공부하지 않은 문외한이었다면 매우 아름답고 건강해 보였을, 그래서 감동에 젖었을 숲이었다. 그럼에도 졸참나무와 느티나무, 굴참나무가 자라고 있어야 할 공간을 대신 차지하고 있는 소나무들은 그 자체로 불편함을 가중하는 요소가 되었다. 수목의 나이는 수종을 불문하고 전체적으로 대략 40~50년 정도로 유사해 보였다. 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은 아니었다.

75년 전, 봉암사를 둘러싸고 있던, ‘큰 수도원을 세울’만큼의 아름드리나무들이 가득 차 있던 숲은 어디로 갔을까? 봉암사 숲은 안타깝게도 특별수도원으로 지정되기 이전인 1970년대 말 즈음 크게 벌목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면, 한국전쟁 이후 봉암사 계곡으로 들어와 살던 화전민들이 이곳을 나가기 전까지 꾸준히 벌목을 이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한국전쟁 이후 특별수도원이 되기까지 약 30년의 시간 사이 어느 즈음에 숲이 제 모습을 잃은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은 그리 반갑지는 않은 경험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모순적인 근심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찰이 숲을 잘 지켜내기 위한 고민으로 지정한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이 그것이다. 언뜻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력하게 인위적 간섭을 차단할 수 있는 제도이니, 봉암사를 지키고자 한 스님들의 큰 결단과 숲을 보전하려 한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강력한 제도로 숲에 들어서려 하는 외부의 탐방객은 막을 수 있었지만, 정작 숲의 온전성(스스로 그러한 자연)을 파괴하는 엔진톱은 막아내지 못했다.
과거 화전민에 의해 숯으로 잘려 나가거나 산판이 이루어졌던 숲이 스스로의 회복력으로 상처를 치유할 즈음, 또다시 엔진톱이 이 숲을 쓸고 지나간 것이다.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이후인, 지금으로부터 약 7~8년 전 간벌사업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타까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동광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살펴본 희양산의 숲은 간벌로 인해 이미 온전성을 잃었음을 알수 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숲을 오르다 지름티재가 다가올 즈음, 가슴 속 답답함을 다소 풀어주는 굴참나무 숲이 나타났다. 숲의 나이는 대략 40~50년, 주변의 숲과 비슷하지만 굴참나무와 함께 서로 다른 다양한 생명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바로 숲의 본 모습이다. 이곳의 나무들은 모두 아래 숲에서 보던 나무들보다 건강해 보였고, 서로가 스스로의 삶을 영위하는 ‘자연스러움’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었다. 비록 고목의 숲에서 보이는 연륜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젊고 활기찬 생동감이 넘치는 어엿한 청년의 숲이었다.


스스로 회복하고 치유하는 숲

숲의 초입에서 느낀 불안함을 이곳에서 얼마간 씻어낼 수 있었고, 앞으로 봉암사의 숲이 어떻게 변화할지 미래를 엿볼 수 있어 조금은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숲을 함께하는 내내 스님과 주고받은 숲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비로소 그 숲을 바라보며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늘 숲을 보존하기 위해 산을 오르는 산감의 그것과 숲의 온전성을 고민하는 연구자의 마음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말이다.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과도 좀 부딪혔죠. 마을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릴 때부터 자유롭게 드나들던 숲인데 이제는 들어올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지금도 여기가 고향인 분들은 좀 들어오게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 숲이 옛날에는 마을 분들이 소풍으로 놀러 오고 하던 곳이었거든요. 연세가 드신 후에 다시 한번 이 계곡과 숲에서 놀았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이제는 출입을 금한다는 것이 많이 알려져서 충돌은 없지만 마음이 쓰이긴 합니다.”

75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 사회는 많이 바뀌었고, 이에 따라 산감스님의 역할 또한 변했다. 최근 대부분 사찰에서 산감이라는 소임이 사라지는 추세다. 그럼에도 봉암사 주지스님의 말씀, 그리고 동광 스님과의 숲 동행을 하며 산감스님의 역할은 달라졌을 뿐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불어 수행처인 사찰에서 숲의 중요성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부각될 것이라는 확신도 생겼다.

과거의 산감은 땔감을 구하려는 인근 주민의 무단벌목과 눈앞의 이익에 결탁한 산판 사업을 막고, 산에서 나는 각종 약초와 먹을거리를 지키는 일이 주된 역할이었다면, 현대의 산감은 스님들의 수행을 방해하는 이들의 접근을 막고, 때로는 길을 잘못 들거나 산행에 지친 대중들을 보살피면서 숲이 온전한 자연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지키는 역할임을 알 수 있었다.
사찰은 단순히 수행처를 넘어, ‘부처님 뜻대로’ 온 우주의 모든 생명이 함께 온전히 어울려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리라.

“수좌스님들의 포행길은 정해진 게 없어요. 계곡을 따라서 올라가기도 하고, 또 연밭 쪽으로 내려갔다 오기도 하고, 아예 시간을 두고 산을 오르기도 하지요. 암자 쪽으로 돌아오는 길도 여러 갈래가 있는데, 스님들마다 제각각 자연스럽게 마음가는 대로 다닙니다.”

주지스님의 말씀이다. 용맹정진하는 스님들의 포행길은 여러 갈래지만 ‘깨달음’이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것을 우리는 ‘자연스럽다’고 한다. 숲 또한 숲이 마음대로 자랄 수 있도록 두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성장한 숲은 수많은 생명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온전한’ 숲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수행자의 깨달음은 숲의 온전함과 같을 것이다. 이것이 곧 ‘삶’ 그 자체이다. 그리고, 숲의 삶 자체가 온전하게 변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또 다른 생명, 벌들이 이곳 봉암사 숲에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동광 스님의 말씀은 숲을 오랫동안 관찰한 경험에서 묻어나는 해결책의 하나로 충분해 보인다.

엔진톱의 출입은 사람의 출입보다 더 큰 숲의 위협이다. 스스로 그러한 생명들을 무참히 베어내는 행위는 사찰 숲과는 결코 맞지 않는다. 이곳 봉암사를 포함해 모든 사찰의 숲에 엔진톱의 출입이 금해지는 날을 기대한다. 앞으로 100년 후, 봉암사 결사를 위해 들어가셨던 큰스님께서 마주했던 그 숲이 우리를 잇는 이들에게 펼쳐지는 봉암사를 그려본다.

 홍석환 부산대 조경학과 교수이자 환경·생태계획 분야의 전문가다. 숲의 생명력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숲의 역할을 깊이 고민해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 기후재난연구소 공동대표이자 조계종 환경위원회 위원, 영축총림 통도사 환경위원회 위원이다.

희양산 봉암사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054-571-9088
http://www.bongams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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