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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비워낸 자리에
마음 채우는 시간

박신영 역사에세이스트의 템플스테이

글. 편집부 사진. 하지권

템플스테이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은 저마다 다양하다. 사찰 특유의 공간 배치가 주는 아늑함, 자연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 느껴지는 고즈넉함. 그 모든 순간의 감각들이 차곡차곡 쌓여 템플스테이의 기억을 특별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참가자들은 예불과 108배, 명상 등 한국불교의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하고, 방사에서 책을 읽거나 도량을 산책하며 모처럼의 여유를 만끽하기도 한다. 스님과의 차담에서 마음을 치유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템플스테이를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 중에도 유독 남다른 애정을 가진 이들이 있으니, 바로 다회 참가자들이다. 세상에 발 딛고 살아가는 중에도 사찰에서의 일상을 그리워하며,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자연스레 템플스테이를 위한 일정을 계획한다. 박신영(51) 씨도 그중 한 명이다. 역사에세이스트 작가로 활동하는 그는 사찰을 마음의 고향으로 여긴다. 템플스테이를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그의 일상 또한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장 힘든 순간 만난 템플스테이

“처음 템플스테이와 인연을 맺었을 때, 여러 가지 힘든 일을 겪으며 살아온 지난 삶에 대한 울분이 있었습니다. 제 운명에 화가 나 있었고 동시에 몹시 외롭고 지쳐 있었어요. 그때 템플스테이에서 생각지 못한 치유의 순간을 경험했지요. 삶이 뒤바뀐다거나 하는 큰 변화는 아니지만, 제 마음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조금씩 바꿔 나가는 계기가 됐습니다.”

작가가 되기 전 그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회사 대표의 직장 내 부당행위로 인한 피해자가 되기 전까지 말이다. 피해를 바로잡기 위해 나섰고,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직원들이 비슷한 피해를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5명의 피해자들과 함께 대표를 상대로 법적 절차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기나긴 싸움이 이어졌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속되는 동안, 그는 우리 사회에 일상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편견과 차별이 얼마나 많은 여성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를 절감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이들이 생각지 못한 상처를 주기도 했다. 지난한 싸움 끝에 대표의 부적절한 행위는 결국 법의 심판을 받았다. 그러나 통쾌한 만큼, 더 슬프고 고독해졌다.

이때의 경험은 십여 년이 지나 책으로 출간됐다. 역사에세이만 써왔던 박씨였지만 부당함에 당당히 맞서 바로잡은 경험을 공유하고자 했다. 동시에 힘든 과정을 지나온 스스로에 대한 격려이자, 비슷한 피해로 고통받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연대의 기록이었다. 공감과 지지가 대부분이었지만 일부 심각한 악플에 시달리면서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됐다.




그리고 2019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원망과 분노, 깊은 우울감이 공황 증세로 그를 찾아왔다.
스스로의 운명에 화가 났다는 것은 그가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잠을 자지 못하는 밤이 쌓였고 감정의 소용돌이를 잠재우기 위해 책으로 도피했다. 독서와 글쓰기는 그의 공허함을 채워주는 오랜 친구이자 의지처였다.

운명 향한 분노가 연민으로 변해

힘든 시간을 보내던 무렵, 어머니의 1주기가 돌아왔다. 그리 애틋한 모녀지간은 아니었지만, 그저 종교에 의지해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 싶었다. 그렇게 찾은 곳이 서울 금선사다. 이곳에서 박씨는 첫 템플스테이를 경험했고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난생처음 108배를 했다. 작은 변화의 씨앗이 심어진 순간이다.

“「108참회기도문」에 맞춰 천천히 절을 하는데 참회문의 한 구절이 마음속에 훅 들어왔어요. 교만하지 않겠다는 발원이었습니다. 그때 문득 내가 조금쯤 오만한 마음으로 세상과 싸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당함에 맞서는 강한 모습 이면에, 지치고 상처 입은 마음이 보였다. 더 나은 운명, 더 나은 삶을 위해 세상과 싸우고 있지만, 결국 행복을 찾기보다 너무 소모적으로 살았던 것은 아닌지 돌아봤다. 이를 문득 깨닫는 순간 분노가 연민으로 변했다. 그동안 잘 버텨온 스스로를 다독이고 싶었다.
참회문에 따라 모든 생명이 평화롭기를 발원하며 절을 했다. 무엇보다 스스로가 과거의 악연에서 벗어나 평화롭기를 발원했다. 그날 산사의 소박하지만 정갈한 1인 방사에 홀로 앉아 오랜만에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이후 박씨는 우울증과 공황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다니면서 서울 근교의 사찰로 몇 차례 템플스테이를 이어갔다. 여자 혼자 여행할 때 항상 느끼던 불안감도 사찰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한밤중 깜깜하고 고요한 사찰에서도 혼자가 아니라는 안정감이 있었고, 무엇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템플스테이의 매력에 푹 빠진 그는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장기 템플스테이 사찰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2022년 1월, 작은 배낭에 노트북과 책 몇 권을 넣고 완도 신흥사로 향했다. 서울에서 대중교통으로만 5시간이 넘게 걸리는 신흥사는 아름답고 다정한 사찰이었다. 스님과의 차담이 특히 좋았고 템플스테이 실무자의 무심한 듯 살뜰한 관심도 고맙고 친근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신흥사는 이후 매년 계절마다 한 번씩 찾는 마음의 고향이 됐다.
“새벽예불에는 꼭 참석해요. 비현실적인 시공간에 「예불문」 울려 퍼지는 소리가 정말 감동적이거든요. 곁눈질로 스님을 따라 합장 반 배하고 절을 하면서 우리말 「예불문」을 가만히 듣다 보면 문득문득 뇌리를 치는 구절들이 있어요. 그 구절들을 곱씹다 보면 위로도 되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주는 느낌이죠.”

비현실적인 감동 전하는 새벽예불

박씨는 특히 칠정례(七頂禮)의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를 좋아한다. 우리말로는 “지극한 마음으로”라고 시작하는 구절이다. 이를 반복해 읊조리면서 절을 하면 바닥에 이마를 대는 순간이 남다르게 느껴진다는 설명이다. 엎드린채 지극한 마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함부로 말하고 쓰고 행동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곤 한다.

우리말 『반야심경』도 거의 외우고 있다.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라는 대목은 매 순간 뭉클하다. 『반야심경』을 외울 때마다 두려움도, 아집도 없이 살아가겠다는 발원을 올린다. “불자는 아니다.”라고는 하지만, 이미 불교의 가르침이 일상에 자연스레 스며있는 듯했다.

“「108참회문」과 「예불문」, 『반야심경』을 템플스테이에서 알게 된 덕분에 교만해지지 않고 겸손해지려 노력하게 됐어요. 스님과 함께 차담을 하면서 다른 참가자분들의 고민을 함께 듣고 대화하면서 삶의 무게에 대해 겸손해지기도 하고요.
템플스테이에 꾸준히 참가하면서 좀 더 긍정적이고 편안한 성격으로 변한 것 같아요.”


예불시간 외에는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신흥사 방사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바다에 숨통을 틔웠고 아름다운 일출과 일몰은 마음을 다독여주는 듯했다. 스님은 차담을 할 때마다 박씨에게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라.”고 당부했다. 정말 그러려고 노력하다 보면 내 인생도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차담을 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살아온 삶을 들으며 때론 공감하고 때론 서로 위로했던 시간은 언제나 따뜻한 기억이다.

신흥사에서 장기 템플스테이를 하며 머물던 어느날에는, 가족이 참석하지 못하는 제사에 대신 참석해 도울 일이 있었다. 명부전에서 바라보는 바다를 좋아해 자주 앉아 있었기에 우연히 이어진 인연이었다. 영가의 극락왕생을 빌며 찻잔을 올리는 순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이 들었다. 극복했다고 생각했지만 과거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했었다는 자각과 함께, 다시 진심을 다해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그제서야 마음 한 켠이 좀 후련해졌다. 그날의 기억은 애증의 기억으로 남았던 어머니를 잘 떠나보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나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는 시간

“사찰에 머무는 동안에는 나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요. 그러면서도 여러 인연을 만나고 평온하게 일상을 보낼 수 있죠. 이 과정에서 과거를 보내고 현재를 잘 사는 연습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힘들었던 과거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줬던 인연들을 말 그대로 과거로 흘려보내려고 의식적으로나마 노력하는 과정들이 현재를 잘 살아가는데에 많은 도움이 됐죠.”

박씨는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자신의 현재 문제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기 어렵다.”며 “반면에 템플스테이는 산속 외부와 격리된 공간에서 진지하게 자아성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뿐 아니라 사찰에서 주는 밥을 먹으면서 안전하게 머물 수 있다는 점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고 웃었다.

3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30회 이상 템플스테이를 참가한 경험에 비추어 꿀팁도 하나 소개했다. 한 사찰에서 장기 템플스테이를 할 때, 혹은 자주 가는 사찰 템플스테이가 있다면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사진 찍어 남겨두라는 것. 좋아하는 경치를 정해 여러 번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두고 나중에 사진을 모아보면, 시간이 흘러가고 모든 것이 변화하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박씨가 신흥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경치는 범종각 뒤로 펼쳐지는 완도바다, 템플스테이 사무국이 있는 건물 바닥의 세 번째 디딤돌이 그가 항상 사진 찍는 곳이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선 목련나무가 꽃을 피우고 지는 모습도 사랑한다.

“목련 꽃망울이 서서히 움트고 피어나 만개했다가 다시 지는 모습을 보면, 모든 순간이 아름답고 그 자체로 울림을 줘요. 보기에도 좋지만 담고 있는 의미가 참 크게 다가오죠. 같은 장소에서 같은 구도로 찍은 사진이지만, 같은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어요. 그렇게 시시각각 변하지만, 동시에 매 순간이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거죠. 어쩌면 우리의 인생도 그런 것 아닐까요?”

 완도 신흥사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청해진남로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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