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플스테이 홈페이지 한국사찰음식 홈페이지
지난호 보기
sns 공유하기

웹진 구독신청최신 웹진을 이메일로 편하게
받아볼 수 있습니다.

봄의 생기를 품은 살리는 밥상

산청 지리산 대원사

글. 조혜영 사진. 하지권

봄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동풍이 불고 얼음이 풀리며 동면하던 벌레들이 깨어난다는 입춘?
낮의 길이가 밤의 길이보다 길어지기 시작하는 춘분?
제비 한 마리가 날아왔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은 아니라고 했던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락가락하는 우리네 마음처럼,
봄이 온 줄 알았던 대지 위에 다시 눈이 쌓이고 찬바람이 내려앉는다.

봄은 그렇게 온다.
언 땅을 뚫고 고개를 내미는 냉이처럼.
여린 살갗 속에 생명의 기운을 품고 기어이 찾아오고야 만다.
연한 줄만 알았는데 단단하다.
산사의 봄도 그렇다.
바야흐로 봄이다.

깨어남을 위해 몸과 마음을 응축하고 거두는 시간

지리산에도 봄이 왔다. 산중 절을 찾아가는 발걸음마다 봄의 기운이 어린다. 그야말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소생하다’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기 전까지는, 이 문구가 봄이 되면 들려오는 그렇고 그런 상투적인 표현이라고만 생각했다. ‘거의 죽어가다가 다시 살아나다’, ‘소생하다’는 없던 것이 새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죽어가던 생명이 다시 살아난다는 뜻이었다. 봄은 살리는 계절이었다.

사찰음식은 계절을 닮았다. 봄, 산사의 밥상은 살리는 밥상이다. 6년의 고행 끝에 고타마 싯다르타가 먹은 유미죽이 그랬듯, 한술의 음식이 죽어가던 몸과 마음을 살리기도 하는 법이다. 그 음식에 봄의 생기가 담겨 있다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오후 느지막이 지리산 대원사를 찾았을 때, 경내가 봄의 향기로 그득했다. 봄바람을 타고 갓 캔 냉이 냄새가 코끝으로 흘러들었다. 다음 날 점심 공양으로 낼 냉이 만두 준비가 한창이었다. 흙 묻은 냉이를 다듬는 손길이 바쁘다. 대원사 템플스테이를 총괄하고 있는 심훈 스님이 과거 채공 소임을 맡았던 경험을 살려 솜씨를 발휘할 계획이다. 총무 여진 스님이 손발을 맞춰 심훈 스님을 거든다.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바뀔 때 면역력을 높이고 기력을 회복하는 데 봄나물만 한 것이 없습니다. 100일간의 동안거를 마친 선방 스님들에게 냉이를 넣어 만든 만두는 최고의 보양식이자 별미이죠.”

겨우내 산문을 걸어 잠그고 동안거에 드는 수행자의 시간은 어쩌면 동면과도 같다. 오직 깨어남을 위해 몸과 마음을 응축하고 거두는 시간. 그렇게 문 없는 문을 찾아 마음 길을 헤매던 수행자에게도 봄이 찾아왔다. 봄의 햇살과 흙, 물과 바람을 머금은 제철 채소가 동면에 들었던 수행자를 살릴 참이었다.

먼저 만두소를 만들기 위해 다진 무와 표고버섯을 볶고, 김치와 양배추도 잘게 다져놓는다. 우리 콩과 바닷물로 만든 건강한 두부를 으깨고, 다진 당면은 진간장으로 밑간해 놓는다. 이제 데친 냉이를 다질 시간이다. 물기를 품어 색이 짙어진 냉이가 커다란 양푼에 한가득 담겼다. 세상에 주인공 아닌 게 없다지만, 오늘만큼은 냉이가 주인공이다.

심훈 스님이 야무진 손놀림으로 냉이의 물기를 쪽 짜내고, 공양간 보살님들이 힘을 합쳐 냉이를 송송 다져낸다. 마음을 모으니 언제 끝날까 싶던 일도 금세 끝나버린다. 다진 재료들을 잘 섞고, 직접 담근 조선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마지막으로 땅콩 가루를 넣는 게 포인트다.

“절집 만두에는 고기가 안 들어가니까 땅콩을 넣으면 단백질 보충도 되면서 특유의 풍미가 올라와요. 톡톡 씹히는 맛도 재밌고요.”

냉이가 주인공이라면 땅콩은 조연, 요즘 말로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씬스틸러(scene-stealer)’인 셈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선방 스님들이 많아서 만두를 한 번에 4천 개씩 만들곤 했어요. 만두 빚는 데만 내리 사나흘이 걸렸죠. 이번엔 아주 간단하게 만드는 거예요. 호박이랑 우엉도 다져 넣고 고추도 넣으면 더 맛있는데….”

절집의 공양은 본디 맛보고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지만, 소임을 맡은 이가 정성을 다해 일념으로 맛을 내고 영양까지 배가된다면 그 또한 수행이요, 보살행이 아닐까.

저녁 공양으로는 버섯으로 만든 반찬들과 고사리를 넣은 두부조림, 냉이 튀김이 나왔다. 2014년 사찰음식 특화사찰로 지정된 만큼, 대원사의 공양은 소박하지만 담백하고 깊었다. 천천히 씹으면 씹을수록 자연의 맛이 혀끝으로 전해진다. 냉이 튀김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나 김치가 일품이다. 오신채와 젓갈을 넣지 않은 사찰 김치임에도 시원하고 깊은 맛이 난다.

어릴 적 살던 집 마당에 묻어둔 항아리에서, 할머니가 손수 꺼내 찢어주시던 김장 김치의 맛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도 어떤 ‘마음’이 나를 살린다. 정성껏 만든 음식을 소중한 이가 맛있게 먹어주길 바라는 마음, 그 음식을 먹고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 그 음식의 기운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길 바라는 마음……. 그 마음들이 모여 한 ‘사람’을 만들고, 결국엔 ‘세상’을 만든다는 것을 이제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수천년을 흘러온 자연의 생명수

다음 날 새벽 4시 30분, 미명을 깨우는 범종 소리와 함께 대원사의 새벽 예불이 시작됐다. 대원사를 끼고 흐르는 지리산의 계곡물 소리가 예불 소리와 어우러져 화음을 이룬다. 만물이 깨어나 저마다의 소리를 낸다. 그 소리가 살아있는 법문이 되고 화두가 된다.

지리산 동쪽 700미터 고지 깊은 산중에 자리한 대원사는, 자연 속에서 휴식과 치유를 바라는 템플스테이 참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2024년 한 해 동안 무려 7천여 명이 대원사 템플스테이를 찾았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템플스테이 참여자들과 아침 공양을 함께 했다. 특별히 아침 공양 시간에는 공양간 한쪽에 커피와 식빵이 마련되었다. 템플스테이를 찾은 현대인들을 위한 대원사만의 작은 배려다. 토스터에 식빵을 굽고 바질 페스토와 잼을 발라 한입 베어 문다. 모닝커피를 곁들이니 여행지에서 먹는 호텔 조식이 따로 없다.

물이 좋아서일까. 갓 내린 커피 맛이 은은하게 스며든다. 지리산 대원사는 원래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동의보감』에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를 약수라 칭했는데, 대원사 계곡물이 바로 서출동류수다.

세계적인 워터 소믈리에 마이클 마스카(Michael Mascha)가 2023년 한국을 찾았을 당시, 한국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물로 지리산 대원사에서 마셨던 약수를 꼽기도 했다. 그는 지리산 대원사 약수에 대해 수천 년 쌓인 토양이 필터 역할을 해 불순물을 걸러냈고, 시원한 목 넘김이 좋다고 평했다.

그래서 그런지 절 주변 솔잎을 따 지리산 약수로 담근 대원사의 송차(松茶)는 어디서도 못 사 먹는 천연 피로회복제다. 자연이 스스로 거르고 정화한 그 물로 매일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차를 내려 마신다. 수천 년을 흘러온 자연의 생명수가 깨달음의 길을 가는 수행자의 피가 되고 뼈가 된다.

자연이 스스로 거르고 정화한 그 물로 매일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차를 내려 마신다. 수천 년을 흘러온 자연의 생명수가 깨달음의 길을 가는 수행자의 피가 되고 뼈가 된다.

대원사 장독대에 내려앉은 오후의 햇살

본격적인 만두 빚기는 아침 공양을 마친 후 시작됐다. 주지스님까지 가세해 여덟 분의 스님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냉이 만두를 빚는다. 같은 시각, 가마솥이 있는 옛 공양간에는 오랜만에 아궁이에 장작이 지펴졌다. 들기름을 칠해 깨끗이 닦아두었던 가마솥에 물이 끓기 시작한다. 잠시 후, 스님들이 곱게 빚은 냉이 만두가 이 가마솥에서 쪄질 예정이다.

가마솥 담당은 총무 여진 스님이 맡았다. 아궁이에 장작을 넣으며 불의 온도를 맞추는 스님께 그 비결을 물으니 짧은 답이 돌아왔다. “그냥 감각으로 하는 거죠.” 음식이 맛있어 조리법을 물어보면 ‘적당히’ 넣고 ‘알맞게’ 볶으라는 엄마표 레시피처럼 알쏭달쏭한 답이다. 오직 감각으로 불의 온도를 맞추는 일은 정념의 상태에서야 가능한 일일 테다. 세상사 모든 일이 곧 수행이요, 정진 아닌 것이 없다.

물이 끓는 가마솥에 냉이 만두가 담긴 쟁반이 3층으로 세워졌다. 아궁이 연기 때문에 눈이 매워 연신 눈물을 흘리던 여진 스님이 아예 부뚜막 위로 올라가 냉이 만두를 쪄낸다. 30분 정도 흘렀을까. 가마솥 뚜껑을 여니 하얀 김 속에서 촉촉하게 잘 쪄진 냉이 만두가 윤기를 더한다. 들러붙지 않도록 표면에 참기름을 바른 냉이 만두를 먼저 조왕신께 공양 올리고, 부처님 전에 올릴 것도 따로 덜어놓는다.

냉이 만두를 다 쪄낸 가마솥에 이제 쑥국을 끓일 차례다. 제철 봄나물로 냉이와 함께 쑥을 빼놓을 수 없다. 먼저 다시마와 겨우살이로 육수를 낸다. 참나무에 붙어사는 겨우살이는 나무의 영양분을 가득 품고 있다. 다시마와 겨우살이를 건져내고 나면 얇게 저민 무를 넣어 푹 끓여준다. 거기에 된장을 풀고 쑥과 표고버섯을 넣는다. 마지막으로 쌀가루와 들깻가루를 섞어 묽게 반죽해 풀어주면 대원사 표 쑥국 완성이다.

35년 전, 심훈 스님이 막 출가했을 당시만 해도 공양간에 커다란 가마솥이 세 개나 있었다고 한다. 폐허로 방치됐던 대원사를 중창하면서 만허당 법일(法一, 1904~1991) 스님은 제일 먼저 비구니 선원부터 개설했다. 대원사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만들려는 원력이었다. 법일 스님은 참선하는 선방 스님들을 위해 매일 삼시세끼 공양을 아끼지 않았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절집 공양간은 현대화되었지만, 법일 스님의 원력은 대원사의 전통이 되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오늘 대원사의 점심 공양은 말 그대로 ‘승소(僧笑)’다. 승소란 스님들이 너무 좋아해서 이 음식만 나오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는 사찰의 별미 음식이다. 주로 국수를 승소라 불렀는데, 오늘은 승소가 차고 넘친다. 쑥국과 냉이 만두 옆에 냉이 주먹밥과 봄동 강된장 쌈, 고수 무침이 곁들여졌다. 밭에서 직접 캔 고수 향에 나도 모르게 침이 고인다. 알록달록 봄의 빛깔이 어우러진 산사의 밥상이다. 쌉싸름한 봄나물의 맛이 온몸의 모든 세포를 깨우고 눈을 환하게 한다. 쑥국을 한입 들이키니, 겨우내 가슴을 답답하게 했던 번뇌가 쑥 내려가는 듯하다. 「오관게」 그대로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러웠다. 마음의 온갖 욕심을 내려놓는 참회의 식사다.

봄의 기운으로 소생한 나는 봄 그 자체가 되었다. 그렇게 새로운 봄을 살아 나갈 힘을 얻었다. 이 음식을 함께 먹은 템플스테이 참여자들도, 대원사의 스님들도 분명 그러할 것이다. 대원사 장독대에 오후의 햇살이 내려앉았다. 바야흐로 봄이다.

  조혜영 에세이집 『똥글똥글하게 살고 싶어서』 저자. BBS불교방송 및 BTN 불교TV 구성작가이자 KBS 라디오 드라마 작가, 월간 <불광>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대학에서 ‘문해력’ 강의를 하며 읽고 쓰는 즐거움을 세상과 나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