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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깃발이 휘날리다

당간지주

글. 노승대 사진. 하지권 자료제공. 국립대구박물관, 리움미술관

규모가 좀 있는 고찰을 방문할 때,
사찰의 입구에서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유물이 바로 당간지주(幢竿支柱)다.
기다란 돌기둥이 나란히 서 있는 단순한 형태의 당간지주는 한때 사찰을 꾸미는 중요한 장엄물이었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만 발달해 온 독특한 문화재다.

우리나라처럼 많은 당간을 세운 나라는 없다.

당간이란 ‘당(幢)’이라 불리는 깃발을 매달아 세운 긴 장대를 말한다. 그러나 긴 장대를 그대로 땅 위에 세우면 쓰러지기 때문에 두 개의 돌기둥을 양쪽에 세워 장대가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해야 한다. 이 두 개의 돌기둥이 바로 당간지주이다.

깃발을 걸기 위한 장대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로 많이 만들었지만, 내구성이 짧은 단점이 있다. 그래서 철로 만든 철당간이 등장하고, 돌로 만든 석당간이 출현하게 된다. 그렇다면 당은 어떤 모양일까? 원래 깃발 종류에는 기(旗)와 당, 그리고 번(幡)이 있다. 기는 평면의 천에 그림이나 문양을 넣은 것이니 태극기를 연상하면 된다. 번은 법당을 장엄하기 위하여 걸 수 있도록 만들어진 형태다. 수실이나 매듭 등으로 화려하게 꾸민다. 사십구재나 천도재 때 불단이나 영단을 꾸미는 여러 가지 번이 여기에 해당한다. 당은 사각형이든 원통형이든 기본적으로 입체 형태로 만들어서 기나 번보다 훨씬 장중하다. 장대 끝에 매다는 것이므로 번과 다르지만, ‘당번(幢幡)’이라고 붙여 쓰니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는 당간과 관련된 문화재만 국보 2점, 보물 29점을 보유하고 있다. 지방문화재까지 포함하면 헤아릴 수조차 없다. 불교권 국가에서 우리나라처럼 많은 당간을 세운 나라는 없다. 일본 사찰에서도 보기 힘들고, 중국 사찰에서는 간혹 두 개의 당간을 경내에 세우는 경우가 있다. 동남아 불교권에서도 흔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철저하게 한 개의 당간을 사찰 입구에 세운다.

당간은 왜 유독 한반도에서 유행하게 되었을까?

당간은 인도에서 먼저 출현했다. 그러나 인도의 당간은 우리나라나 중국처럼 땅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탑 꼭대기에 설치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현장 스님의 『대당서역기』에 실려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신 후 처음으로 만난 두 장자(長者)에게 공양을 받고 설법하였는데, 두 장자가 예배할 기념물을 청하자, 머리털과 손톱을 주었다. 두 장자가 어떻게 모시고 예경하는지를 묻자, 석가모니 부처님은 가사를 접어서 깔고 그 위에 갖고 다니시는 발우(밥그릇)를 엎어 놓은 뒤 다시 지팡이를 발우 위에 세워 보이셨다는 이야기다.

이로부터 불탑은 발우를 엎어놓은 형태의 복발탑(覆鉢塔)이 되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도 황금 항아리에 사리를 담아 탑 안에 안치하고, 그 위에 긴 기둥을 세워 법륜을 표시하고 비단 번을 단 후 등(燈)과 꽃, 향, 음악으로 받들어 섬기며 공양하였다. 지금도 네팔의 복발탑에는 꼭대기 기둥에 깃발을 매단다. 이러한 복발탑이 중국에 들어오자, 다층 건물 형태의 목탑이나 전탑으로 바뀌면서 불탑 위에 섰던 깃발 기둥이 지상으로 내려오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사찰 경내에 당간을 세우고 꼭대기를 용머리 모양으로 장식한 다음 깃발을 단 벽화가 둔황 막고굴 61굴과 159굴에 남아 있다. 곧 중국 사찰에서도 당간을 세우는 풍습은 이어졌고, 후에는 돌로 만든 석당간도 나타났다.

당간과 솟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삼한(三韓)에서는 귀신을 믿는다. …
   여러 국(國)에는 별읍(別邑)이 있으니 이를 소도(蘇塗)라고 한다.
   (그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여러 도망자가 (소도에) 들면 돌려보내지 않으니 기꺼이 도적질을 한다.
   소도를 세운 뜻은 부도(浮屠: 불탑)와 유사하나, 선악을 행하는 것에 차이가 있다.


곧 삼국이 생기기 전, 한반도에 있었던 마한·변한·진한의 부족 국가에는 ‘소도’라는 신성 지역이 있어서, 죄인이 들어가면 함부로 잡아갈 수 없어서 도적들의 소굴이 되었다는 것이다. 『삼국지』는 297년 이전에 지어진 책이므로, 중국에는 이미 불교가 들어왔지만 삼한에서는 불교를 모를 때이다. 한반도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처음으로 불교가 공식적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탑이 있는 사찰처럼 신성 지역인 것은 같은데, 행하는 바가 다르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 소도를 땅이 솟아오른 높은 장소라 하기도 하고, 소도에서 ‘솟대’가 나왔다고도 한다. 신성한 지역(소도)을 표시하기 위해 큰 나무(솟대)를 세우는 것은 한반도 지역의 오랜 풍습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농경문 청동기(보물)의 한 면에는 갈라진 나무 끝에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서, 솟대 문화는 청동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도 기다란 나무 장대 위에 나무로 깎은 새가 앉아 있는 솟대의 전통을 지켜가고 있는 마을들이 있다.

 

왜 당간을 세우게 되었을까

중국으로부터 당간이 전래하자 한반도에도 당간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신성 지역을 표시하는 전통의 솟대 문화와 결합해 수많은 당간이 세워지게 된다. 또한 단순히 불탑을 장엄하는 의미에서 벗어나, 사찰을 장엄하고 보호하는 의미도 갖게 된다. 당간을 세우는 의미에 대해서는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국보)에 새겨진 명문에 밝혀져 있다.

   (당간에서 깃발이 휘날리는) 모양은 학이 푸른 창공을 날아오르고,
   용이 푸른 창공을 뛰쳐오르는 것과 같다. 세운 사람은 크게 신심을 일으키고,
   바라보는 사람은 반드시 올곧은 정성을 기울일 것이니 진실로 마귀를 항복시키는 쇠지팡이요,
   도적을 물리치는 무지개 깃발이다.

이 철당간은 본래 원통형 철통 30개를 연결하여 세운 것으로, 지금은 20개만 남아 있다. 원래 높이라면 60척, 약 18m에 이르는 높이이니 대충 5층 건물의 높이다. 청주 너른 들판 평지에서 우뚝 솟은 당간에서 휘날리는 깃발은 누구에게나 평안과 위안을 주고, 종교적 심성을 일깨웠을 것이다. 당간은 신성한 사찰이 있음을 알려주는 표지 역할도 하지만, 점차 사찰에서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이를 알리는 당을 달아두는 용도로도 쓰였다. 통신 시설이 없던 시절, 멀리서도 당간에 휘날리는 깃발을 보면 지금 사찰에서 어떤 불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는 뜻이다.

또 종파를 표시하기 위한 용도로 쓰였다는 주장도 있다. 고려시대까지 많이 세워졌던 당간은 억불 시대인 조선시대에 이르러 거의 세워지지 못했다. 나무로 만든 당간은 세월 속에 사라져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철당간도 몇 기가 남아 있지만, 꼭대기 장식까지 완전히 보존된 것은 한 기도 없다. 높이가 높다 보니 벼락을 맞기가 쉬웠던 탓이다. 석당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장대 끝 장식이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없었는데, 1975년 3월 29일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읍 성내2동에서 새마을사업 하수도 공사를 하던 중, 무게 50kg의 급동당간용두(龍頭) 장식(보물)이 나와서 실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데, 그 안쪽으로 도르래가 설치되어 있고 아랫부분이 터져 있어 깃발을 매달아 올릴 수 있도록 고안된 형태였다. 또 실제의 용두당간 모습을 축소해서 만든 금동용두보당(국보)이 리움미술관에 소장됨으로써, 전체적인 당간의 모습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당간의 변천사

당간은 통일신라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세워졌지만, 당간은 없어지고 당간지주만 남아 있는 것이 많다. 이 시대의 당간지주로는 40여 기가 알려져 있다. 높이 5m가 넘는 당간지주도 있지만, 보통 3~4m에 이르는 것이 많다. 물론 당간지주를 세운 연대는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중에 당간지주에 명문을 남긴 유물도 있다. ‘흥덕왕 2년(827)에 세웠다’는 내용을 새긴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보물)다. 이 유물을 통해 당간을 세우는 기간이 대략 6개월이 소요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당간은 없지만, 땅에 놓이는 지대석부터 기단, 당간의 받침돌인 간대석, 당간지주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는 당간지주도 있다. 바로 김제 금산사 당간지주(보물)다. 진표 율사가 중창한 혜공왕 대(765~780)의 조성으로 보고 있다. 신라 문화는 석굴암과 불국사를 짓던 750년대가 최전성기였기에, 이 시기에 서라벌의 기술력이 지방에 전파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이 당간지주는 안정된 조형미에 세련된 미감을 가지고 있다. 필자가 본 당간지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신라 당간지주의 표본이라고 부를 만하다.

금산사에서 멀지 않은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 2기도 비슷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특이하게 두 당간지주는 90m가량 떨어져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이처럼 한 사찰에 2기의 당간지주를 설치하는 경우는 한반도에 거의 없다. 혹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미륵사지는 백제 무왕이 창건한 절이지만, 신라가 통일한 후에도 경영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특이하게 미륵사지 두 당간지주의 당간은 그 재료가 나무가 아니라 돌이었다. 석당간이었던 것이다. 발굴된 당간용 기둥들은 팔각형이었으며, 위로 갈수록 가늘게 만들었음이 밝혀졌다. 신라시대의 철당간으로는 공주 갑사 철당간(보물)이 있다. 1893년 7월 25일 벼락을 맞아 상부의 네 단이 떨어졌다고 하니 본래 모습은 28단이었고, 높이는 18m에 이르렀을 것이다.

당간은 암각화도 남기고 있다. 2011년에 발견된 것으로, 경주 탈해왕릉 인근 표암(瓢岩)에 새겨진 마애암각화다. 신라시대의 사찰 풍경을 선각(線刻)으로 남긴 것으로, 탑과 법당, 스님이 보이고 오른쪽에 당간과 바람에 펄럭이는 당이 조각되어 있다. 명문에 의하면 742~743년 사이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호방한 당간지주, 늘씬한 당간지주

고려시대의 당간을 꼽으라면 누구나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보물)를 첫머리에 올릴 것이다. 굴산사는 범일 국사가 창건한 선문구산(禪門九山) 중의 하나인 사굴산파(闍堀山派)의 본산이었다. 대충 다듬어 자연석 돌기둥처럼 보이는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모든 당간지주를 통틀어 가장 거칠면서도 호방한 기개를 보여준다. 몸체가 클 뿐 아니라 높이도 5.4m에 이르는데 절터보다도 훨씬 높은 언덕에 당당히 서 있어 시원하고 호쾌한 기운이 주변을 압도한다.

고려시대 당간의 모습은 1123년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 간 서긍의 『고려도경』에도 묘사되어 있다. “개성 흥국사의 당간은 동(銅)으로 만들었는데 아래 지름이 2척, 높이가 10여 장이고 금으로 칠을 했다. 꼭대기는 봉황의 머리로 되어 있으며 비단 번을 물고 있다.”고 기록했다. 지름 60cm에 높이가 30m가량이었을 것이고 금을 입혔으니 무척 화려했을 것이다. 또한 용머리가 아니라 봉황의 머리로 꼭대기를 장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은 법주사 철당간은 고려시대인 통화 24년(1006)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종 3년(1866) 대원군이 당백전을 만들기 위해 철당간과 함께 용화전의 청동미륵불상을 떼어가는 바람에 옛 당간을 잃어버렸다. 그 후 여러 차례 재건을 거쳐 1970년 지금의 철당간으로 복원됐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당간의 흔적으로는 담양 객사리 석당간(보물)과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보물)이 있다. 특히 담양의 석당간은 1839년 큰 바람에 나무 당간이 쓰러져 돌로 다시 세웠다는 비석이 옆에 서 있다. 신라양식을 이어받은 당간지주는 천안 천흥사지 당간지주(보물)다. 천흥사는 1010년경 지어진 사찰이므로 이 당간지주는 신라의 정돈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고려 초기의 대표적 유물일 것이다. 늘씬하게 다듬은 당간지주는 홍성 오관리 당간지주(보물)로, 그 높이가 4.8m에 이른다. 하지만 기단부가 다 없어져서 두 돌기둥만 땅에서 솟구친 모습이라 보기에 안타깝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국가의 통치 이념이 유교로 바뀌게 되고 불교계는 급격하게 그 세력이 위축된다. 자연히 당간을 거는 풍습은 끊어지게 되지만 괘불을 거는 괘불지주의 모습에 응용된다. 사찰 마당에 거는 걸개그림인 괘불은 임진왜란 후에 유행한 수륙재, 천도재를 거행하는 행사에 사용되는데 괘불이 크면 클수록 두 개의 기둥을 세우기 위한 괘불지주도 커지게 마련이다. 괘불은 높이가 10m에 이르는 것도 있기 때문에 큰 괘불지주 2기가 사찰 마당에 나란히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당간과 솟대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화유산이다.

 노승대 우리 문화를 향한 변함없는 열정으로, 30년 넘는 세월을 문화유산 답사와 공부에 쏟았다. 그 결과물은 <불광>, <사람과 산> 등 잡지에 기고해 왔으며, 저서로 『사찰 속 숨은 조연들』,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