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나무숲 야생차밭,
우리고 마시고 거닐며 마음을 쉬는 삶
나주 불회사 비로약차 템플스테이
글. 모지현 사진. 하지권
지명으로써는 섬이 많아 다도(多島)인 게 익숙한데,
차가 많아 다도(茶道)라 한다.
배 만드는 곳을 선소(船所)라 하고, 종이 만드는 곳을 지소(紙所)라 부르듯,
이 고장 나주시 다도면은 고려시대에 다소(茶所)가 있어
차를 특산품으로 공납했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 차, 지명과 역사 속에만 있을까? 아니다.
지금도 면면이 계승되고 있다.
차를 만들고 차를 마시는,
덕룡산 불회사 비로약차 템플스테이를 운영하는
나주 불회사 주지 철인 스님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신중탱 같은 불회사 뒷산 장엄
“불회사는 들어가는 길목이 참 아름답지.” 누군가 얹은 말이 생각난다. 과연 그렇다. 편백나무, 벚나무, 단풍나무, 호랑가시나무. 각각의 나무들이 개울 따라 이어진 진입로를 장엄한다. 좌우보처마냥 마주 보고 선 석장승도 마주친다. 턱수염을 땋은 쪽이 할아버지 장승, 온화하게 웃고 있는 쪽이 할머니 장승이다. ‘안녕하세요. 할매, 할배 장승님들.’ 속으로 애교스런 인사도 건넨다.
개울 건너 대웅전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선다. 눈앞의 산색이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불보살님들이 모여 있는 신중탱 같은 불화에서 상단과 중단, 하단을 황색 구름이 경계 짓듯 산색이 삼단으로 구분돼 있다.
전각 기와지붕 위로 낮게 깔린, 햇살을 반사하여 언뜻 회녹색으로 보이는 광택은 동백나무 군락이고, 그 위층은 짙은 녹색과 강렬한 기세의 비자나무 구역이다. 잎눈마다 봄기운을 잔뜩 끌어올렸을 뿐, 아직 잎이 돋지 않은 회백색의 가지는 갈참나무의 것이랬다. 화폭의 좌측 아래, 희고 거대한 목련은 눈부시게 만개했고, 이웃한 홍매화는 보는 즉시 향기를 느끼게 한다.
목련나무 가까이 다가간다. 멀리에서 볼 땐 주먹만 한 그 꽃이 주인공 같더니만,
가까이 다가서자 울창한 비자나무 아래 주인공이 따로 있다. 차나무다. 겨울 지나 쇤 잎들이 퍽 거칠어 보이지만, 사이사이 통통하고 보송보송한 잎눈이 조용하게 반짝인다.
봄에는 오직 발견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기쁨이 있다. 도처에 아주 많다.
마음에 약이 되는 차,비로약차
나주 불회사 템플스테이의 중심 콘텐츠는 ‘비로약차’다. 불회사 대중들은 곡우가 지난 5월 초부터 잎차인 비로차를 생산하고, 5월 중순이 넘어가면 특유의 돈차를 만든다. 신도들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차를 따고 찻잎을 절구에 찧은 후에 다식틀에 넣어서 단단하게 긴압하는데, 이 시기에 템플스테이를 오면 자연스럽게 참가자도 제다 체험을 하게 된다.
“6월 초부터 본격적인 제다 템플스테이를 시작합니다. 오전 한 시간 동안 찻잎을 채엽하고, 취향에 따라 녹차 혹은 전차를 만들어요. 여기 수련원 앞마당에 아궁이도 올려놓고요. 마당에서 찻잎을 찧고 마루에 앉아 돈차를 빚습니다.”
비로약차는 일곱 가지 약재를 배합해 만든다. 며느리도 모른다는 특급 비법(?)이 있을까 궁금했는데, 철인 스님의 입에서 비법 재료가 술술 읊어진다.
“곽향, 정향, 계피, 건강(마른 생강) 등 건강한 재료들을 써요. 차가 본디 냉한 성질이기 때문에, 몸을 따뜻하게 만드는 성질의 약재를 넣어서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도록 합니다. 다만 막 만든 새 차는 마실 수 없고, 제다 체험을 한 사람들에게는 지난해에 만들어 미리 숙성해놓은 차를 내놓습니다. 해를 묵을수록 더 맑아지고 향이 강해져요.”
생산량은 얼마나 될까? 생잎으로 1톤가량의 찻잎을 따면 결과물은 300킬로그램 정도 나온다. 변수는 일손. 갈수록 일할 사람이 부족해지면서 찻잎 딸 사람이 적으면 100킬로그램 정도의 차를 만들 수 있다.
올해는 3월까지 제법 매섭게 춥기도 했고, 봄이 가물기도 하여 작황이 괜찮을까 염려하였더니, “올해 차는 약속을 지킬 것”이라 장담한다.
“차밭을 늘리기 위해 새로 차를 심은 곳들은 아직 나무가 여려 냉해 피해를 입었지만, 원 야생차밭 나무들의 줄기와 뿌리는 무사해요. 올해 생육은 지장 없을 것으로 봅니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지고 있는 차의 맥
비로약차는 불회사에서 조선 중기부터 만들어진 차다. 찻잎을 찧어서 뭉친 형태의 차는 육우의 『다경』이 고려에 건너오면서 시작됐다. 그때 불렸던 이름이 전차 혹은 돈차이다. 중국차를 마시는 사람에게 전차라는 이름은 낯이 익다. “다른가요?” 묻자 빙긋 웃는다.
“중국차에서 말하는 직사각형 모양의 전차(塼茶)는 벽돌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고, 비로전차의 전차는 가운데 구멍이 뚫린 동전 모양을 따서 동전 전(錢) 자를 썼어요. 당시 동전은 화폐, 즉 돈(money)이었기 때문에 우리말로는 돈차라 하는 것이지요. 돈차의 형태는 통일신라시대, 나아가 고구려 고분에서 발견되기도 합니다.”
나주 지역이 이토록 유구한 차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과문하여 생소하다. 우리나라 차나무 농사의 북방한계인 대전 이남. 차로 명함을 내민다 싶은 동네들을 떠올려본다. 하동, 악양, 구례, 보성, 장흥, 심지어 영광. 그런데 나주 차가 있다는 이야기는 좀체 들어보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8년, 이에이리 가쓰오라는 일본인 무리가 나주 불회사 돈차를 발견하고는 이듬해까지 강진, 해남, 장흥, 멀리는 구례 화엄사까지 차 생산 현황을 조사합니다. 이 조사 결과를 수록한 것이 『조선의 차와 선』이에요.
앞선 조선시대에 불교가 쇠퇴하면서 차 문화가 사라진 것을 19세기 다산 정약용 선생, 초의 스님, 그리고 초의 스님의 제자들이 다시금 부흥시켰지요. 초의 스님의 차맥을 이은 이학치 스님께서 불회사 주지를 역임하면서 차 문화의 불씨를 살려냈고, 그 차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출가부터 지금까지 일상다반사
불회사의 역사와 전통에 이토록 정통한 것은 철인 스님이 단지 이곳 주지이기 때문일까. 예상치 못한 반전이 등장한다.
“내가 머리를 깎은 절이 바로 불회사입니다. 불회사에 처음 왔을 때 스님들이 차를 만들고 있더라고요. ‘이 절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차도 만들고 산세가 좋아 수행하기 좋은 곳이겠구나.’ 이곳에서 출가하기로 마음을 결정했습니다. 차 철이 되면 아침 6시부터 저녁 11시까지 스님들 대여섯 명이 교대해 가며 차를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말 그대로 중노동이었죠.”
철인 스님은 고향 같은 절 불회사 주지 부임 후인 2018년, 종무소 맞은편에 무료 찻집 ‘비로다경실’을 만들었다. 템플스테이 참가자가 도착하면 사찰을 소개한 후 찻집을 개방한다. 방문객은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인 ‘스님과의 차담’ 시간이 아니라도, 즉 스님이라는 호스트가 있지 않아도 얼마든지 자발적으로 차를 우리고 마실 수 있다.
“차를 마시는 일은 사념처 수행 중 ‘느낌’과 관련이 있습니다. 물을 따르는 소리, 손의 움직임, 다관의 촉감 등 차를 마시는 전 과정에서 ‘느껴지는’ 것들에 집중해 보세요. 그러나 단지 느끼는 것이 다는 아닙니다. 모든 수행의 목적은 무상, 고, 무아를 알기 위함입니다. 차를 마시는 것도, 세상 사는 것도 욕구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무상함을 느끼기 위함이라는 데에서 일맥상통하죠. 이를 연습하다 보면 편안함과 무애자재함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옵니다. 차를 마시면서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자비의 화신이 되는 경험을 하시기를 바라요.”
춘불회 하불회 추불회 동불회
이 고장에는 예부터 ‘춘불회추내장’이라는 말이 있단다. 봄철 화사함은 불회사만 한 곳이 없고, 가을은 내장산이 제일이라는 의미다.
언젠가 유홍준 교수는 불회사를 겨울에 꼭 가보아야 할 사찰 중 하나로 꼽았다. ‘춘불회동불회’ 중얼거려본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사계절 중 어느 계절이 제일인가요?
돌아오는 답. 뻔하지만 진심이다. “4월 초 신록이 우거지는 때도 좋고, 여름철 차를 만들 때도 좋습니다. 가을엔 단풍 경치를 즐기면서 마음을 편안히 휴식하시고, 겨울은 유홍준 교수님의 추천을 믿고 오셔도 좋아요.
최근 나주시에서 비자나무 숲길을 조성했습니다. 절을 한 바퀴 도는 산책길을 걸어보세요. 힘들이지 않고 길게 걸을 수 있는 곳이니까 자연 걷기 명상이 됩니다. 아무쪼록 불회사에 오셔서 쉬어가시기 바랍니다.”
모지현 2012년 불교적 글쓰기를 시작했다. 무등산 증심사에서 요가 템플스테이, 티클래스, 싱잉볼소리명상 등 불교문화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