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더 깊은 위로를 건네는 도솔천의 봄
고창 도솔산 선운사
글. 홍석환 사진. 하지권
겨우내 움츠렸던 생명들이 따뜻한 바람을 맞이한다.
숲의 여기저기가 모두 제 집인 양 산새들은 봄의 소리로 치장을 마치고 분주히 움직이고,
겨우내 잠잠했던 식물들은 더워질 햇살을 받으려 흙 속에 스며드는 물을 한껏 받아들인다.
봄은 우리에게 자연이 지닌 건강한 생명력을 비추며 몸과 마음을 열라는 신호를 보낸다.
이렇게 봄은 시작된다.
2025년, 이 땅을 살아가는 이들의 봄은 자연의 다른 생명들과 달리 활기를 내색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의 짐을 풀지 못할 사건들로 다가왔다. 아름다운 우리 강산이 화마에 뒤덮이며 생명의 온기를 모두 빨아들이는, 말 그대로 ‘화탕지옥’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아직 봄이 채 오기도 전에 검은 연기구름과 함께 몰아친 거대한 불길은 봄을 준비하는 이들의 평온한 마음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봄이 와도 봄이 오지 않는 시간, 추위는 사라졌지만 빼앗긴 봄의 마음을 찾을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고통의 장소를 넘어 봄을 새로이 맞이할 수 있는, 마음 치유의 공간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때이다.
선운사의 봄, 모자람 없는 평온의 숲
마주하는 것으로도 눈물이 흐를 것 같은, 검은 잎 사이로 붉은 선혈이 툭 떨어질 것 같은, 선운사 동백꽃을 만나는 계절. 주변의 모든 나무가 잎을 떨군 사이 검은 상록 숲의 자태를 혼자서 보여주는 동백숲의 꽃들은 봄에 만개하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선운사 방문은 ‘겨울’이 제격이라고들 한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맑은 물소리와 함께 마치 붉은빛이 둥실 흘러 내려가는 듯한 가을의 단풍나무 터널을 보고 있자면, 선운사의 풍경은 ‘가을’만이 담을 수 있다고 외친다. 싱그러움을 응축시킨 하늘의 짙은 푸르름과 땅의 붉은 석산꽃이 대비되는 모습을 보노라면 선운사에는 꼭 ‘여름’에 오라는 듯하다.
이 모든 계절마다 선운사를 찾아 마음껏 참선하며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바쁜 현대인의 삶은 그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강렬한 계절을 선택해야만 하는 고통이 따른다. 겨울에 오라는 동백, 여름에 오라는 짙은 녹음에 반영되는 석산, 가을이 최고라고 뽐내는 계곡에 투영된 노거수의 붉은 단풍은 그 선택을 혼란스럽게 한다. 각자 겨울과 여름, 가을을 최고의 때라고 나름의 합리적 주장을 내어놓는다.
그래서 선운사의 봄은 속세의 방문객들에게는 매혹적이지 않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선운사는 봄의 사찰이다. 화려하지 않은, 도솔천의 내원을 감싸는 아름다운 숲이 어느 것 하나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두루 고르게 이어지기에, 모나지 않는 평온함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친 일상과 함께 매일 새롭게 마주하는 조마조마한 뉴스들로 인해 마음속에 가득 찰 수밖에 없는 괴로움을 놓아두고 올 곳으로 선운사의 봄만큼 어울리는 곳이 또 있을까 싶다. 고요한 구름조차 이곳에서는 멈춰서서 참선할 것 같은, 모자람이 없는 평온의 숲이 선운사의 봄이다. 고요함 그 자체가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선운사의 봄으로 다가가 보자.
선운사의 드넓은 주차장에 들어설 때까지는 그 고요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차에서 내리는 순간 반전이 일어난다. 주차장에서 몇 걸음을 옮겨 선운천 건너로 시선을 돌리면, 이곳이 봄의 사찰임을 알려주는 1,000년의 징표가 말 그대로 ‘살아’서 인사를 한다. 그 세월의 마주함만으로도 찾는 이가 짊어진 괴로움의 무게를 한 움큼 덜어준다. 항상 봄인 나무 상춘등(常春藤), 송악의 부드러운 고요함을 맞으며 마치 지금의 무게를 이곳에 의지해도 된다는 미소를 보내는 듯하다. 긴 시간의 무게를 거대한 바위에 의지하며 그 오랜 시간을 함께한 이 덩굴나무의 따뜻함이 느껴진다. 그렇게 봄의 사찰로 들어간다.
노란 생강나무꽃 농밀한 향기, 장사송은 강건함을 뽐내고
상춘등을 뒤로하면서부터 걷는 걸음마다 봄이 느껴진다. 이른 봄을 깨고 나온 도롱뇽이 실개울에 알들을 붙여두었고, 청딱다구리가 맑은 울음으로 반겨준다. 혼탁했던 생각들이 흩어지기에 벌써부터 충분하다. 이렇게 몇 걸음을 걸어 들어오면 또 다른 봄의 나무가 이제 정말 선운사에 왔노라고 안내한다. 호흡만으로도 맑은 정신이 될 것만 같은 차나무밭이 사찰 담장 밖에서 줄을 맞춰 서 있다. 지난겨울 추위가 얼마나 길었는지, 동해를 입은 가지들을 옆으로, 언제 겨울이 있었냐는 듯 싱그러움을 발산한다. 이렇게 움츠러든 마음을 기댈 봄을 만난다. 이곳에서도 서로 기대어 자라는 나무를 보면서 위안을 얻는다. 하필, 느티나무 고목을 사이에 두고 자란 단풍나무 두 주가 뿌리를 뻗어 서로를 의지하다가 급기야 한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서 약한 생명이 서로를 의지하면서 강해짐을 배운다.
도솔천에 계셔서 그런지 지친 영혼을 반기는 스님 역시 평온함이 묻어난다. 선운사의 봄을 담은 따뜻한 차 한 잔과 마주한 연수국장 효근 스님과 총무국장 현적 스님의 밝은 미소는 불쑥 찾은 손님이 아닌 반가운 친우를 맞는 듯 맑다. 차의 맛이 이처럼 달 수 없다. 템플스테이에서 맞는 스님의 미소는 이곳이 주는 위로 같았다.
템플스테이를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는 선운사의 자연 계곡은 다른 산사에서 볼 수 없는 또 다른 포근함과 정겨움이 있다. 폭우에도 물이 크게 불어나지 않아 계곡은 물살의 흔적이 넓지 않다. 평지가 길게 이어지는 깊은 계곡의 모습답게 언제나 물이 흐른다. 자연의 모습이 변형된 그 흔한 콘크리트도, 돌 석축도 보이지 않는다. 선운산만의 포근한 산세가 이런 모습을 만들었으리라. 물살이 거센, 계곡만의 계곡이 아닌, 숲속 나무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흐르는 것만 같은 자연이 만든 온전한 계곡의 모습 또한 겨울의 얼음을 녹인 따뜻함으로 다가온다. 계곡의 물을 하늘에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물을 덮는 갖가지 활엽수들은 이제 막 어린 싹을 틔우려 한다. 조급한 친구들은 이미 꽃망울을 피우고 때로는 짙은 녹색의 잎을 드러내고 있다.
숲속에서 봄의 향기를 알리는 노란 생강나무꽃은 농밀한 향기로 봄의 세상을 방문한 객의 평온함을 잠깐 깨우기에 충분히 강렬하다. 평온하게 온전한 계곡과 숲을 만끽하면서 걸을 수 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언가에 걸릴라 조심히 바닥을 보며 걷는 산행이 아닌, 계곡을 따라 봄의 숲에 시선을 맡기며 걸을 수 있는 평온한 계곡 길이다.
3월, 아직은 잎이 제 색을 드러내기에는 이르기에, 한참을 활엽수들만이 빚어낼 수 있는 다채로운 봄 단풍을 상상하며 걷다 보면
불쑥 눈앞에 이질적인 색채가 다가온다. 장사송이 특유의 강건함을 뽐내며 서 있고, 그 사이로 쇠딱다구리 두 마리가 봄을 맞을 채비로 바쁘다. 또다시 잠시간의 평온한 선율이 흔들리지만, 이내 도솔암까지 걸음을 옮기다 보면 다시금 고요함 속으로 들어간다. 시간을 잊은 듯 활엽수림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다 보면, 어느새 도솔천의 내원 한가운데 모셔진 마애불을 마주하게 된다.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동학이 그토록 원했던 하늘의 위로가 다가오는 곳이다. 안타깝게도 이번 산행에서는 그 근심을 완전히 내려놓지는 말라고 하는 듯하다. 한 번의 방문에 숨겨진 비기를 내놓으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잠시 매무새를 정리하려면 꽤 긴 시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실 듯하다.
고흐가 그토록 표현하려 했던 순간
잠깐의 가쁜 호흡으로 오르는 낙조대와 천마봉에서는 도솔천의 내성을 뒤덮고 있는 온화한 활엽수림이 한눈에 펼쳐지는 장관이 눈을 사로잡는다. 봄이 활짝 피어나는 4월의 초입이면, 활엽수림이 빛과 만나 빚어내는 온화한 파스텔 그림이 펼쳐지리라. 고흐가 그토록 표현하려 했던 빛의 색들, 햇볕이 봄의 나뭇잎과 만나 만들어내는 순간의 색채가 모두 들어있을 것만 같은 착각으로 들어가기에 충분할 만큼. 아직은 이른 봄이기에 빛과 자연이 만들어내는 향연을 상상으로만 가져간다.
선운사를 둘러싼 도솔천의 내원, 선운산이 주는 봄의 아름다움은 그 위치가 큰 몫을 한다. 상대적으로 따뜻한 남부 지역에 사는 나무들이 대체로 선운산까지 자라주고, 추운 곳을 좋아하는 나무들도 선운산까지는 내려온다. 바닷가를 좋아하는 나무들도 함께 자라기에 이처럼 다양한 나무들을 한 곳에서 만끽할 수 있는 곳은 드물다. 거기에 완만한 구릉으로 둘러싸인 평지의 계곡은 이곳에 늘 안정적인 습도를 유지하게 해주어 모자람이 없다. 어느 하나의 빼어남보다 모자람 없음이 평온함과 정겨움이리라. 그래서 도솔천의 내원이다.
도솔천의 숲은 봄의 숲이다. 숲속으로 들어가면 나무마다 자신을 드러내는 색을 묻혀 내려오는 볕에 걸음을 맡기면 되고, 숲을 조망할 언덕에 오르면 그 색들의 향연에 눈을 맡기면 된다. 이 봄 잎이 만들어내는 색의 다채로움은 마치 봄의 음악을 색으로 표현한 것만 같다. 이렇게 자연이 만드는 봄 색은 디지털의 상상을 넘어선다.
동행한 연수원장 지태 스님께서 동백꽃이 떨어지듯 넌지시 툭 던진다. “불편한 것은 참아도, 아름답지 않은 것은 못 참는 게 선운사지요.”
그렇게 자연 속에서, 말보다 더 깊은 위로를 건네는 선운사의 봄을 느낀다. 도솔천의 봄은 속세의 무거운 마음을 이곳에 기대라고 한다. 큰 바위에 의지해 1,000년을 봄으로 살아온 송악처럼, 단풍나무 형제가 서로를 의지하려 뿌리를 하나로 만든 것처럼, 숲속 소나무가 옆에서 쓰러지려는 친구를 도와 한 몸이 된 것처럼, 부족하면 의지하면 된다. 비록 무거운 짐을 짊어진 이라도 그 삶 또한 아름답다.
홍석환 부산대 조경학과 교수이자 환경·생태계획 분야의 전문가다. 숲의 생명력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숲의 역할을 깊이 고민해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 기후재난연구소 공동대표이자 조계종 환경위원회 위원, 영축총림 통도사 환경위원회 위원이다.
정정 ※ 지난 2024년 겨울호(vol. 68)에 실렸던 송광사의 창건 시기에 관한 기록을 신라 말(8세기경) 혜린慧璘 선사로 정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