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플스테이 홈페이지 한국사찰음식 홈페이지
지난호 보기
sns 공유하기

웹진 구독신청최신 웹진을 이메일로 편하게
받아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환해지는 순간들

서울 삼각산 도선사

글. 김규보 사진. 하지권 사진제공. 도선사

관세음보살의 자비는 무엇이고 어디에서 오는가.
보살의 모습을 표현한 상의 인자한 얼굴에 우리는 안심하고,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는 경전 대목에 우리는 발심한다.
매일 성심을 다해 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우리는, 결국 관세음보살이 되어 간다.
자비로 향하는 길을 걷겠다는 그 마음이 곧 자비인 까닭이다.
이제 33관음성지 순례의 첫발을 내딛는다.
길을 밝혀 주는 양 쏟아지는 햇살을 머금으면서, 마음에 피안의 씨앗을 심어 본다.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모두에게 가득하길, 온 세상이 안온해지길.

백두대간 줄기 하나가 서울에 다다라 세 봉우리를 일으키니, 바로 삼각산이다. 백운봉, 인수봉, 만경봉 바위벽이 깎아지르며, 작은 산봉 무리가 사위를 휘감은 삼각산 풍채는 그윽하고 강건하다. 가히 절경이요, 길지인 삼각산 동쪽 자락에 도선사가 자리를 잡았다. 무엇이든 뽑아 버릴 듯 세찬 산줄기의 바다에서 도선사는 등댓불 밝은 섬처럼 꿋꿋하다. 천년 시간을 간직하고서 다시 천년을 꿈꾸는 역사만큼 장구한 기운이 넘실대는 덕분이다. 긴 세월 숱한 중생이 줄지어 쌓아 올린 신심 속으로, 삼각산을 빼닮아 웅숭깊은 도선사 속으로 들어간다.

도선사 가는 길은 세속의 일을 쉬이 잊게 한다. 서울 북단 우이동, 건물과 차도가 촘촘하게 박힌 거리를 벗어나자마자 숲길이 반기는 것이다. 삽시에 시야를 채운 수림이 참으로 맑아, 마음에 묵은 것들이 툭 떨어져 나간다. 산줄기는 굽이칠지언정 품이 넉넉해 발걸음 또한 가벼워진다. 본래 마음은 자유자재하여 둔한 번뇌 따위가 범접할 수 없는 거라고, 푸른 자연이 새삼 일러주는 것 같다.

얼마나 많은 순례자가 이리 하얗게 비워 내면서 삼각산을 올랐을까. 통일신라 후기인 862년, 도선 국사가 창건하고 지금까지 천 년 동안 포개진 마음들이 숲길을 순백하게 빛내고 있다.

삼각산이 기억하는 도선사의 시간

1,000년 뒤 말법 시대를 예견한 도선 국사는 삼각산 일대에서 불법이 부흥하리라 믿었다. 산세의 격이 그토록 충일하거늘, 부처님 법이 재차 흘러 나갈 사찰을 되는대로 지을 리 만무하다. 그는 오래 견고할 터를 찾아 도선사를 짓고, 거대한 바위를 갈라 주장자로 관음보살을 새겨 넣었다. 창건 설화이자 오늘날 도선사 관음신앙의 기원이 되는 이야기다.

실제 도선사 대표 유형문화유산인 마애불입상이 여래상임에도 관음보살상으로 불린다는 사실은, 관음신앙이 탄탄하게 뿌리내렸음을 말해 준다. 이후 1530년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도선사는 세종의 딸 정의공주의 원찰 ‘도성암’으로 나온다. 당시 공주의 신심이 어찌나 대단했는지, 사찰 공사에 필요한 자재가 부족하자 자택 별채를 허물어 쓸 정도였다.

규모를 확장한 도선사는 19세기 중반부터 역사의 주요 장면에 등장한다. 한때 국가 권력을 거머쥔 안동 김씨 집안의 수장 김좌근이 후원하여 1864년 중수했으며, 1887년 임준 스님이 석탑을 세우고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1903년 고종이 명하여 대웅전 등을 중창한 이듬해에는 국가기원도량으로 지정돼 명성을 떨친다. 반세기 지난 1961년 주지로 취임한 청담 스님이 호국참회원을 건립한 이래, 크고 작은 불사가 이어져 현재 도선사의 모습이 되었다.

당대 인물들이 이곳을 주목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천년 세월을 건넌 오늘도 도선 국사의 믿음을 입증하는 순례 행렬이 계속되기에.

맑고 밝게 흐르는 진리의 말씀

순례자는 자비문, 미소석가불, 사리탑, 삼천지장보살상, 호국참회원을 참배하고 대웅전을 돌아 마애불입상 앞에 선다. 불법이 쇠퇴한 시기, 지고한 말씀이 다시금 웅비할 터다운 아름다움과 장엄함이 마침내 절정을 이룬 여기, 마애불입상. 자연 속에서 하얗게 비운 마음은 도선사에 들어 차례차례 합장하는 동안 이미 신심의 환희로 가득해졌다.

공(空)하되 꽉 찬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세계가 걸음마다 펼쳐지는 삼각산 도선사 끄트머리에서, 높이 20미터 바위에 새긴 마애불입상이 순례자를 맞이한다. 우러러야 보이는 크기이건만, 부드러운 옷 주름과 수염 난 얼굴이 정답다. 떠받들길 요구하지 않고, 다만 넌지시 자애를 건네는 듯해 순례자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오른다. 우리는 소원을 읊조렸다. 내가 남보다 낫길 바라는 망심은 푸른 이곳에 존재할 수 없다. 다만 고통은 분별에서 출발함을 알아, 전부 하나라는 이치가 모두에게 선명해지길 기원했다.

뒤따라 당도한 이들도 몸을 낮추고 하나 되어 경배하니, 그 모습은 마치 끊임없이 솟는 불이(不二)의 샘물 같다. 문득 뒤돌아보았다. 울창한 자연과 합일한 도선사 숲길이 강물처럼 유장하게 세상으로 흐른다.

마애불입상

도선사 창건 설화에서 도선 국사가 돌에 새겼다는 관음보살로 여겨지기도 하나, 조선 전기 혹은 후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는 도선사 대표 유물이다. 높이 20미터 바위에 새긴 마애불은 북한산 마애불 가운데 큰 편에 속한다. 앞에는 넓은 예배 공간과 함께 진신사리탑이 놓여 도선사 순례의 종착지이자 중심 역할을 한다. 선 처리가 간략하고 얼굴 표현이 투박해 경외감보다는 친근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 형식은 서울 지역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 창신동 마애관음보살좌상과 경남 양산 지역 지장암 마애아미타삼존불상, 원효암 아미타삼존불상 등 조선 후기 마애불상과 유사해 도선사 마애불입상의 조성 시기를 유추해 볼 수 있다.

1977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청담기념관

도선사를 현재에 이르게 한 청담 스님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2002년 건립했다. 스님이 남긴 서화, 생활 유품, 문방구를 포함한 100여 점을 전시하고, 스리랑카와 미얀마에서 모셔 온 진신사리를 봉안한 기념관은 한국 불교 중흥의 길을 개척한 스님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공간이다.

190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스님은 봉암사 결사와 불교 정화운동 등 한국 불교사에 획을 그은 장면들의 주역이었다. 1961년 도선사 주지로 취임해 사찰을 크게 확장했고, 1966년 조계종 제2대 종정으로 추대된 뒤에는 신도 조직 강화, 승가대학 신설 같은 목표를 제시해 종단 백년대계의 근본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다.

1971년 11월 15일 열반한 스님의 다비식엔 2만여 사부대중이 운집해 세상에 펼친 덕화를 기렸다.

호국참회원

도선사의 주요 법회가 열리는 장소다. 청담 스님은 신라 불교의 통일 염원, 고려 불교의 호국 염원, 조선 불교의 구국 염원에 착안해, 평화 염원에 입각한 수행·실천·생활의 호국참회불교를 주창했다. 모두 함께 불국토를 만들자는 스님의 사상은, 스님이 직접 쓴 ‘자비무적 방생도량(慈悲無敵 放生道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인 호국참회원 본존불 아미타불좌상과 대세지보살좌상은, 복장 원문을 통해 1740년 서울 원통암에서 조성한 뒤 진관암에 봉안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언제 어떤 연유로 도선사에 이운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삼존불상 중 근래 제작했다고 추정하는 관음보살좌상은, 원래 관음보살좌상을 대체한 것이라고 전한다.

 김규보 여행작가. 전 <법보신문> 기자, 부편집장, <인iiin> 매거진 수석에디터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