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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릇의 여름, 한 그릇의 수행
함양 향운암

글. 조혜영

사진. 하지권

계절의 변화는 언제나 눈부시다.
언 땅을 뚫고
얼굴을 내밀던 연둣빛 어린잎들이
어느새 짙은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여름은 성장의 계절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내리쬐는 태양의 기운을 먹고
쑥쑥 뻗어나간다.

나긋나긋했던 봄보다는 억세지만,
질긴 이파리에 뜨거운 열정을 품고
고집스럽게 저마다의 부피를 늘려간다.

산사의 여름 밥상에는
더위를 씻기고 영양을 채워주는
자연의 음식들이 놓인다.

여름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여름을 품어 안는 스님들의 지혜가
제철 밥상에 녹아 있다.

여름,
산사에서는
그 음식을 먹고
마음이 자라난다.

자연이 주는 산사의 여름 먹거리

통도사의 말사인 향운암은 그 이름처럼 향기로운 구름이 머물 것만 같은 고즈넉한 암자다. 입구에 들어서자 구름 색을 닮은 순한 인상의 백구가 반갑게 꼬리를 흔든다. 절집에 사는 개답게 이름도 평정이다. 평정이와 함께 객을 맞는 이는 홀로 향운암을 지키고 있는 명천 스님이다.

밀짚모자를 벗는 스님의 얼굴에 땀이 몽글 맺혀 있다. 고무신이 아닌 장화를 신으신 걸 보니 텃밭에서 막 밭일을 마치고 나온 참이다. 매일 먹을 먹거리를 얻기 위해 스님은 날마다 손수 밭을 일군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라는 백장 선사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향운암 텃밭에는 여름이 자라고 있다. 고추, 생강, 곰취, 케일, 오이, 쑥갓, 상추 등 없는 게 없다. 꼭 텃밭이 아니더라도 주변에 자연이 주는 먹거리가 지천이다.

명천 스님이 향운암에 머물게 된 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하안거에 들기 전 향운암에 홀로 머물고 계신 노스님께 인사드리러 왔다가 점심 공양을 차려드리고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노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가 여기 있으면 내가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은데….”

스님은 노스님의 말씀을 거절할 수 없었고 선방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향운암에 짐을 풀었다. 처마 끝에서 빗물이 똑똑 떨어지던 그날의 풍경을 스님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그렇게 명천 스님을 붙잡은 노스님은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던 종단의 원로 성수 스님이다.

그날 이후 노스님을 모시며 매일 삼시세끼 공양을 차려드렸다. 장을 안 보고 살아보자는 노스님의 말씀에 텃밭을 일구기 시작했고, 그렇게 시작된 절집 농사가 30년을 넘었다. 13년 전, 노스님이 입적하신 후에도 홀로 향운암에 남아 농사짓고 수행하며 많은 계절을 지나왔다.

사찰음식을 따로 배우거나 지도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지만 스님의 음식 솜씨는 멀리까지 소문이 자자하다.

“노스님 모시고 살면서 공양 준비를 게을리할 수 없었어요. 사찰음식이라고 하지만 세속의 맛과 비교하면 맛이 있을 리 없잖아요. 부족한 재료지만 계절에 맞게 본연의 맛을 살리려고 노력했어요. 노스님께서 건강히 맛있게 드시길 바라면서 매끼를 준비했죠. 그러다 보니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새로운 메뉴도 개발하게 되었어요.”

억세면 부드럽게, 부드러우면 여물게 만드는 것이
명천 스님만의 비법 아닌 비법.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中道의 가르침과도 맞닿아있다.

억세면 부드럽게, 부드러우면 여물게 만드는 중도의 음식

어느 틈에 스님이 낫과 소쿠리를 들고 뒷마당으로 향하더니 수북이 자란 머위를 낫으로 쓱쓱 베어낸다. 오늘 스님이 준비하는 산사의 밥상 첫 번째 재료가 바로 머위다. 원래 머위는 4~5월이 제철이지만 여름까지도 먹을 수 있다. 봄에 난 어린잎보다 조금 질기지만 요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식감이 달라진다. 억세면 부드럽게, 부드러우면 여물게 만드는 것이 명천 스님만의 비법 아닌 비법.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의 가르침과도 맞닿아있다.

낫을 쥐고 있던 스님의 손에 이번엔 가위가 들렸다. 연장이 바뀌니 채취할 재료도 달라진다. 법당 앞 담벼락 사이에 피어난 낯선 식물을 가위로 조심스럽게 잘라낸다. 가시가 돋아나 있는 게 얼핏 보면 선인장 같다. 먹어도 되는 식물일까 고개를 갸웃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토종 선인장 천년초란다.

머위, 천년초에 이어 산사의 밥상 마지막 재료는 연잎이다. 비교적 연해 보이는 어린 연잎과 아직 덜 피어 돌돌 말린 연잎도 그대로 딴다.

“노스님이 그러셨어요. 동물이 먹는 건 사람도 다 먹을 수 있다고.”

어느 날은 염소가 먹는 밤나무 가지로 음식을 만들 수 있겠냐 묻는 노스님의 말씀에, 망개나무잎과 민들레를 넣고 밤나무 가지로 물김치를 만든 적도 있었다. 특히 요즘 같은 여름철엔 물김치가 빠지지 않았다. 산에서 나는 키 큰 씀바귀와 왕고들빼기로 물김치를 담그기도 했다. 물국수를 만들려고 국물만 병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해 두었는데, 노스님이 음료수인 줄 알고 마신 적도 있다고 한다.

더위를 씻겨주며 영양까지 생각한, 간소하지만 정성이 담긴 밥상

여름의 초입, 더위를 식혀주는 계곡물 소리가 청량하다. 향운암에서는 수도 대신 산에서 나오는 계곡물을 연결해 사용한다. 호스에서 흘러나오는 계곡물로 채취한 재료들을 씻어낸다. 가시 돋은 천년초는 특히 세심한 손질이 필요하다. 가마솥 아궁이 장작불에 천년초를 살짝 태워주면 가시가 쉽게 떨어져 나간다. 남아있는 가시는 칼로 깔끔하게 제거한다. 머위는 가마솥에 삶아 껍질을 벗겨낸다.

이렇게 재료 준비가 모두 끝나고 본격적으로 음식을 만들 차례다. 오늘 점심 밥상 메뉴는 가마솥 밥과 머위 감잣국, 말린 머위 볶음, 머위 초회, 천년초구이, 연잎 찜이다.

“가마솥에 1인분 밥을 하면 들러붙어서 누룽지가 되기 쉬워요. 양재기에 물을 채워서 중탕으로 밥을 하면 고슬고슬 밥이 잘 되죠.”

통도사에 있을 때 명천 스님은 국을 담당하는 갱두 소임을 맡았다. 대중 생활을 할 때는 맡은 소임 한 가지만 잘하면 되었지만, 노스님을 모시며 암자 생활을 하다 보니 밥 짓고 국 끓이는 일부터 예불, 청소, 빨래, 농사일까지 모두 혼자 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때문인지 한 번에 서너 가지 요리를 척척 해내는 명천 스님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머위 감잣국은 표고버섯과 다시마로 국물을 내고 직접 담근 된장을 푼 다음 머위와 감자를 넣고 뭉근하게 끓인다. 감자가 익으면 다진 깨소금을 뿌려 마무리한다. 말린 머위나물 볶음은 봄에 딴 머윗대를 삶아 말려둔 것을 사용한다. 말린 머윗대를 먼저 참기름에 볶다가 다시마와 표고버섯 끓인 물을 한 대접 붓고 소금으로 간을 하며 물이 졸아들 때까지 볶아낸다. 머위 초회는 삶은 머윗대를 손가락 크기로 썰어 초고추장을 준비하고, 연잎 찜은 면포를 깔고 가마솥에 10분가량 쪄내면 된다. 고춧가루, 참기름, 간장, 깨소금으로 쌈장을 만든다.

천년초구이를 위해서는 먼저 양념장이 필요하다. 고추장과 고춧가루, 꿀, 깨소금, 참기름, 생강가루를 넣고 잘 섞어준다. 생강가루는 직접 농사지은 생강을 말리고 빻아서 만든 것이다. 적당히 자른 천년초와 고추를 젓가락에 번갈아 끼운다. 그 위에 양념장을 고루 발라 석쇠에 넣고 가마솥 아궁이에서 앞뒤로 구워준다. 천년초가 어떤 음식으로 만들어질지 가장 궁금했는데 그럴싸한 꼬치구이로 완성됐다. 자연에서 나는 제철 재료들로 만든 산사의 여름 밥상이다.

“이맘때쯤이면 뒷산에 산딸기가 한창이에요. 4km 정도 산을 올라, 2시간가량 산딸기를 따면 주전자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죠. 깨끗이 씻은 산딸기를 면포에 조금씩 살살 짜서 하얀 잔에 담으면 색깔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여름이면 노스님께 산딸기즙을 만들어 드렸죠. 칡꽃을 설탕에 재어 놓았다가 하루에 한 잔씩 드리기도 했고요.”

사시사철 일이 없는 날이 없겠지만, 여름을 맞는 산사에는 유독 할 일이 많다. 제초 작업은 물론이고 장마철을 대비해 배수로 정리도 미리미리 해놓아야 한다. 노스님이 살아계실 때는 삼베와 모시로 만든 승복에 풀을 먹이는 일도 명천 스님의 일이었다. 행여 절 마당에 이슬이라도 묻어 있으면 풀을 먹인 승복이 젖을까 봐 노스님이 외출하시기 전 비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 닦는 수행자가 먹는 데에 시간을 너무 많이 쓰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든 적도 있지만, 나태해지지 않으려 하루 세 번 밥을 지어 먹는 것이라는 노스님의 말씀에 스님은 지금껏 밥 짓는 일을 수행으로 여겨왔다.
하루를 짓는 밥상, 여름을 건너는 지혜

사실 명천 스님과 성수 스님의 인연은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천 스님이 중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때, 출가를 하겠다며 집에서 제일 가까운 의성 고운사로 무작정 찾아간 일이 있었다. 당시 고운사의 주지가 바로 성수 스님이었다. 성수 스님은 추워서 새파랗게 떨고 있는 중학생에게 저녁밥을 차려주었다. 다른 반찬은 생각 안 나고 하얀 쌀밥에 콩가루 묻힌 시래깃국, 불린 마른미역을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던 것만 기억한다. 그렇게 하룻밤을 절에서 자고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갔다가 이후 성인이 되어 통도사로 출가했다.

“노스님은 아침엔 죽, 점심엔 밥, 저녁엔 국수를 드셨어요. 유난히 국수를 좋아하셔서 매일 저녁 한 끼는 국수를 만들어드렸죠.”

삼시세끼 다른 메뉴를 준비하다 보면 재료 채취와 설거지까지 합쳐 깨어있는 시간의 삼 분의 일 이상을 할애하게 된다. 도 닦는 수행자가 먹는 데에 시간을 너무 많이 쓰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든 적도 있지만, 나태해지지 않으려 하루 세 번 밥을 지어 먹는 것이라는 노스님의 말씀에 스님은 지금껏 밥 짓는 일을 수행으로 여겨왔다.

여름의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 때쯤 저녁 밥상이 차려졌다. 저녁 메뉴는 머위 비빔국수와 튀김, 수박이다. 튀김은 머위와 천년초, 연잎을 밀가루 반죽에 묻혀 튀겨냈다. 더위를 씻어주며 영양까지 생각한, 간소하지만 정성이 담긴 밥상이다.

명천 스님의 솜씨는 요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올해로 28년째 전통 가사 복원 작업을 해오고 있는 명천 스님은 제24회 대한민국 불교미술대전에서 ‘복전의福田衣’라는 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최근엔 서울공예박물관에서 ‘가사의 기원과 변천’을 주제로 강연도 했다.

여름엔 농사일이 바빠서 가사 작업은 비교적 한가한 겨울에 주로 하는데, 밥 먹고 바느질만 하면 꼬박 한 달을 해야 가사 하나가 완성된다고 한다. 아직은 여름이 한창이니 여름의 일을 할 뿐이라고. 그런 스님께 여름을 나는 비법을 물으니, 우문현답이 돌아온다.

“더우면 더운 대로 그냥 사는 거죠. 별거 있나요?”

옛 스님들 말씀에 더우면 쪄서 죽고 추우면 얼어 죽으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더위를 탓하지 말고 더위와 하나 되는 일, 그것이야말로 산사의 여름나기 최고의 비책이 아닐까.

조혜영 에세이집 『똥글똥글하게 살고 싶어서』 저자. BBS불교방송 및 BTN 불교 TV 구성작가이자 KBS 라디오 드라마 작가, 월간 <불광>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대학에서 ‘문해력’ 강의를 하며 읽고 쓰는 즐거움을 세상과 나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