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게 배우는 인간의 덕목
보성 대원사 ‘나를 보게 하소서’ 템플스테이
보성 대원사는 국토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곳 중 하나다.
그 별칭을 떠올리면 자동으로 연분홍 벚꽃잎이 흩날리는 봄철이 연상되지만, 5.5킬로미터에 달하는
왕벚꽃나무 길만이 대원사 가는 길의 아름다움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대원사는 가히 아름다운 물길 따라
흘러 들어가는 절이라고 함직하다. 본사인 송광사에서 출발해 문덕 방면으로 가는 길에서도,
화순군 사평면에서 출발해 거슬러 가는 방면에서도, 국도 15호선과 함께 물이 달린다.
조계산과 모후산 사이를 곡류하는 주암호 그리고 그 지류를 따라
철새와 억새와 수면을 수놓은 윤슬이 노스텔지어의 손수건을 흔들게 한다.

물과 벚나무를 따라 흘러든 대원사는 또한 보성녹차의 시배지이다. ‘녹차수도’의 뿌리라는 의미다. 백제시대에 차 문화가 시작되어 고려 중기에는 선종 수행과 함께 차 문화를 꽃피웠다. 수많은 스님들이 선과 차를 향유했던 이곳에서 지금은 현장 스님이 그 맥을 잇고 있다. 한·일 차 문화교류는 물론 일반인도 누구나 템플스테이를 통해 대원사의 차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활발한 소셜네트워크 활동 속에서 스님은 스스로를 ‘현장법사’라 칭한다. 경장·율장·논장을 모두 통달한 승려를 삼장법사三藏法師라 일컫는데, 말마따나 현장 스님의 박학다식함에는 “우와~!”하는 감탄이 절로 따른다.
수행처를 의미하는 인도말 ‘아쉬람Ashram’에서 착안한 한옥채 ‘아실암’에서 대원사 고차수 잎으로 만든 녹차를 마시며 차 이야기를 나눴다. 오래 우려도 쓰지 않다. 묵직하고 깊다. 이곳 대원사와 현장 스님이 품은 이야기와 같이.
차 맛 모르던 시자가 50년간 배워온 차의 덕목
스님은 언제부터 차를 사랑하였을까. 코너 제목을 곧이곧대로 질문 삼기에는 조금 쑥스러우니 말꼬리를 바꾼다. “스님은 언제 차를 접하셨어요?” 절에 들어와서야 처음 차를 접했다고 한다. 그 인연 고리에 법정 스님이라는 익숙한 이름이 등장한다. 법정 스님의 세속 조카이기도 한 현장 스님은 불가에서도 법정 스님을 사숙으로 연 맺었다.
“법정 스님을 인연으로 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절집에 들어왔어요. 봉은사에서 스님께 차를 대접받고는 송광사에 행자 생활을 하러 내려갔습니다. 불일암이 낙성되던 1975년 구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 수계를 받았습니다. 은사스님 시자를 하면서 차 우리는 걸 배워서 오는 손님들께 녹차를 대접했지요. 그때는 차 맛도 몰랐는데요. 금년이 수계 받은 지 딱 50년이 되는 해예요.”
어떤 차를 주로 드시느냐 묻자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온다. 대만 성엄선사의 말을 빌려 “여러 차, 비싼 차, 좋은 차에 몰두하는 것보다 차를 사이에 두고 나누는 대화가 중요하다.”는 부연. 스님이 생각하는 찻자리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예절을 배우고, 대화하는 법을 배우는 자리이다.
“찻자리에서는 해야 할 말도 있지만 반드시 삼가야 할 말이 있어요. 하나는 정치적인 얘기요, 둘째는 아파트나 주식, 부동산 등 탐욕을 부추기는 이야기이고, 세 번째는 남을 욕하거나 흉보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대화법을 찻자리에서 배우고 그렇게 익힌 것을 일상화해야 합니다. 신라시대 원효대사는 보살계 중 일곱 번째 계율을 최고 중시하면서 신라 사회를 통합으로 이끌었습니다. 그 일곱 번째 계율이 바로 ‘자찬훼타계自讚毁他戒’입니다. 자기 자신을 칭찬 말고 남을 욕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우리는 대부분 반대로 행하고 있지요.”
문화와 예술과 수행을 한 데 아울러
참선 수행자가 차를 마시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잠이 적어지고 정신이 맑아진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바쁜 세상살이에 치여 어떻게든 잠잘 시간을 확보해야만 하는 현대인들은 차 마시면 잠 안 온다는 속설에 차를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 세태를 보이기도 한다.
“해방 이방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의 문화 코드가 엄청나게 변해버렸습니다. 차 문화는 우리나라의 가장 뿌리 깊은 전통문화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교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돼요. 중국의 경우에는 차 한잔을 두고 입술을 적시면서 동서의 철학을 논하는 것을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습니다. 차를 나누고 선물하면서 고마운 마음을 편지로 표현하고 그 편지 속에서 후대에 길이 남을 명시가 탄생하기도 했지요.”
당나라 시인 노동의 작품이자 법정 스님도 즐겨 읽었던 다시茶詩. 현대의 차인들에게도 사랑받는 1,200년 전의 시 「칠완다가七碗茶歌」를 현장 스님이 대원사 버전으로 각색해서 선창했다.
차 한 잔을 마시니 입술과 목젖이 촉촉해지고
차 두 잔을 마시니 외롭고 울적한 마음이 사라지네.
차 세 잔을 마시니 가슴이 열려 오천 편의 시가
흘러나오고
차 네 잔을 마시니 서러운 감정이 팔만 사천
땀구멍으로 빠져나가네.
차 다섯 잔을 마시니 뼈와 살이 맑아지고
차 여섯 잔을 마시니 기혈이 열려 신선과 통하는구나.
차 일곱 잔은 마시기도 전에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천봉산을 노니는구나.
극락 천당이 어디느뇨.
대원사의 맑은 바람을 타고
템플 벗들과 함께
그곳으로 날아가고자 하네.
우와!
대원사 차 역사에 가장 중요한 인물은 자진 원오慈眞圓悟 국사다. 자진국사는 강원도 선원사에서 팔만대장경을 조성하던 시기 선원사의 주지였다. 팔만대장경 불사를 하고 나서 내려온 곳이 바로 이곳 대원사. 대원사는 우리나라 보물로 지정된 진각국사의 저술 『선문염송집』 판각본을 보유하고 있어, 차밭을 가꾸면서 차와 선을 함께 수행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선 문화가 발달한 곳에서는 차 문화가 발달합니다. 중국 달마 고사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달마대사가 동굴에서 좌선을 하다가 졸음을 물리치기 위해 눈꺼풀을 칼로 자른 후 동굴 밖으로 던졌는데, 그 자리에서 자라난 풀이 바로 차였다는 겁니다. 차를 마시면 정신이 또렷해지고 의식이 맑아지고 기운이 하나로 통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차가 좋은 친구와 같지요. 선종의 승려들뿐만 아니라 선비나 공부하는 사람들이 차를 가까이하면 차가 게으름을 쫓아내는 데 좋은 인연을 맺어줬습니다.”
350년 고차수 나무와 함께 자기 자신에 눈 뜨다
이러한 맥락을 뒷받침하듯 대원사에는 농림축산식품부가 국가중요농업유산 제11호로 지정한 ‘보성 대원사 고차수 군락지’가 있다. 고차수古茶樹란 일반적으로 수령이 100년 이상 된 야생 차나무를 말한다. 대원사 야생 고차수의 수령은 무려 350여 년이고, 나무의 키는 최대 3.4미터에 이른다. 녹차나무가 동백과에 속하므로 언뜻 보면 오래된 동백나무라 오해할 수도 있다. 작고 앙증맞은 녹차꽃을 발견하기 전이라면 말이다.
“고차수 군락에 피어 있는 차꽃을 보셨지요? 차꽃의 형태야말로 차의 정신입니다. 꽃이 잎에 감춰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있어요. 거친 잎을 드러내는 것은 자기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고 꽃을 감추는 것은 자기의 가장 큰 자랑을 감추는 일이에요. 이런 덕을 가진 것이 바로 차나무입니다.”
차의 덕목을 체화하는 ‘고차수 제다 템플스테이’가 내년 봄이면 본격 가동될 예정이다. 경내 김지장 박물관에 제다 체험이 가능한 전기 덖음솥을 설치해 두었다. 차 철이 되면 향기로운 차 향기가 가득할 터다. 그뿐 아니라 삶을 반조하는 ‘죽음 체험 템플스테이’, 도반의 인연을 맺어주는 ‘싱글벙글 템플스테이’도 추진 중이다. 요가 명상, 싱잉볼 명상, 티베트 드림 요가 등 참가자 맞춤형 프로그램도 무궁무진하다.
“템플스테이는 일종의 출가 체험입니다. 구산 스님께서는 세속에 살면서 머리는 안 깎더라도 3일 중, 7일 중, 한 달 중, 보름 중이 되어서 출가 체험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사람은 여행을 통해서 배워야 해요. 세속에 있으면서 가장 적은 노력으로 새로움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 템플스테이입니다.”
자기를 알고 싶다면 천 권의 책을 읽고 만 리를 여행하라고 했다.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 세속과는 전혀 다르면서 완전히 새로운 자기 자신에 눈 뜰 수 있는 여정에 현장법사가 오래오래 안내자로 함께 하기를 두 손 모은다.
모지현 2012년 불교적 글쓰기를 시작했다. 무등산 증심사에서 요가 템플스테이, 티 클래스, 싱잉볼 소리 명상 등 불교문화 프로그램을 기획·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