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지. 자유롭지 않을 게 뭐 있어?
조계총림 송광사 8대 방장 현묵 스님
엎어지고 뒤집히는 것이 삶의 본질인 줄 알았다. 불교를 공부하기 전에는 그랬다. 불교가 내게 가르쳐준 것은 엎어지고 뒤집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상相’이었다. 숨 쉬듯 지레짐작하고, 판단하며, 좋고 싫고를 결정해서 만들어낸 ‘상’이 뒤집힐 때마다 나는 내가 엎어지는 줄 알았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길었다.
현묵 스님을 만나고 나는 세 번 엎어졌다. 첫 번째로 ‘조계총림의 방장’이라는 엄중한 자리에 오르신 분이니 엄격하고 무서운 분이리라는 선입견이 뒤집혔다. 유튜브에서 신나게 반야게송을 랩으로 부르는 스님을 보았던 것이다. 두 번째 엎어진 것은 대화를 나누면서였다. 자유분방한 분일 것이라는 내 지레짐작은 틀렸다. 출가할 때부터 엄격하게 원칙을 지키며 성실하게 수행하신 분이셨다. 세 번째 엎어진 것은 이야기가 끝날 때쯤이었다. 대화는 시종일관 물 흐르는 듯했다. 무척 편안하고 자유로워 보이세요, 라고 하자 스님은 미소 지으셨다. “자유롭지. 자유롭지 않을 게 뭐 있어요?”
스님은 달라이라마가 말한 도인의 기준 두 가지를 말씀해 주셨다. 도인은 첫째, 상이 없고 편안하다. 둘째, 도인은 자애롭다. 현묵 스님은 바로 그 기준에 합당한 분이셨다. 세 번의 뒤집힘 모두 기껍고 즐거웠다.
소박한 잡담은 송광사의 가을 풍경으로 시작되었다. 누구도 그러지 않을 수 없으리라. 가을의 송광사는 너무나 아름다우니까. 스님은 단풍이 아름다운 나무와 대나무 숲길, 돌담이 이어지는 길을 하나하나 짚으며 우리가 가본 곳과 가보지 않은 곳을 물으셨다. 스님은 송광사 좋은 풍경을 찍어가라 하시면서도 포즈 잡는 것을 싫어하셨다. 송광사의 풍경을 대표하는 징검다리에 이르러, 스님은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읽었다는 정철의 시를 읊어주셨다.
물 아래 그림자 지니 다리 위에 중이 간다. 저 중아, 게 있거라. 너 가는 데 물어보자. 막대로 흰 구름 가리키고 돌아 아니 보고 가노매라.
“송광사하고 자네하고 인연이 많다.”
스님께서는 “내가 스님이 되려고 했는지 이 시가 확 들어와서 바로 외워지더라, 붓글씨로 크게 적어서 벽에 붙여 놓았다.”고 하셨는데요. 어떻게 수행의 길로 들어서게 되셨나요?
20대 초반에, 절에 가서 참선을 한 일 년 정도 하고 싶더라고요. 해 보면 출가를 하지 않더라도 인생에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영험하다는 도사를 찾아가 물어봤대요. 우리 집 셋째 손자가 절에 가서 살고 싶다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그러자 그분이 “전생에 불가와 인연이 많아서 법복을 훔쳐 입어도 한번은 입어야 할 팔자니까 잡지 말라.” 하더래요. 그러면서 “절에 가면 큰 중이 되겠다.” 하더랍니다.
가족회의를 하면서 할아버지가 “전생에 불가와 인연이 있으니 잡지 마라 카더라.” 하시니 다들 공감을 했어요. 어머니도 조그마한 시골 절의 신도회장을 하셨거든요. 우리 종법에 보면 출가동의서를 받아오게 돼 있어요. 부모님이 붓글씨로 동의서를 써주셔서 그것을 가지고 처음에는 통도사의 경봉 스님을 찾아갔지요.
그런데 경봉 스님이 “나는 이제 나이가 너무 많다. 내가 좋은 스님 소개해 주꾸만. 저 송광사, 구산 스님한테 가라.”는 거야. 그런데 나는 경상도 사람이라 그때만 해도 전라도는 생소한 거예요. 그래서 진제 스님의 법 스승이신 향곡 스님께 찾아갔어요. 내가 인사를 드리고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하니까 “요새 나는 건강도 안 좋아가지고 상좌 잘 안 받는다. 내가 좋은 스님 소개해 주꾸나.” 하면서 송광사 구산 스님한테 가라는 거야.
그때서야 두 분이 도인이라고 하는 구산 스님에게 관심이 생겨서 송광사로 왔어요. 스님이 “너 집에서 잘 보내주더나.” 하시길래 출가동의서를 꺼냈지. 그때 구산 스님이 미소를 지으셨어요. 실제로 동의서를 받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옆에 있던 교무스님도 놀라더라고.
여기서 한철 살고 생각해 보니까 경봉 스님도 팔십 대시고 향곡 스님도 칠십 대 후반이시고, 이러니 얼마 안 가서 선지식 스님들이 다 돌아가실까봐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은사이신 구산 스님에게 선지식 스님들 찾아가 뵙고, 모시고 살면서 안목을 넓히고 싶다고 말씀드렸지. 그 후에 경봉 스님 모시고 살면서 여쭤봤어요. 왜 나를 제자로 안 받아주고 송광사로 보냈느냐고.
“송광사하고 자네하고 인연이 많다.” 이러시더라고. 그러면서 “자네는 오장육부가 튼튼하고 고집이 있어가지고 공부를 하겠다.” 하시더라고요.
경봉 스님, 향곡 스님, 전광 스님, 송담 스님, 봉암사의 서암 스님, 백양사의 서옹 스님, 불국사의 월산 스님…. 여러 선지식 스님들을 찾아가 모시고 살아봤죠. 그렇게 살고 나니까 한 10년 흘러갔어요. 그쯤 되니 한군데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공부하는 길도 어느 정도 알았고, 내 나름대로 열심히 한번 쪼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어디 가면 좋을까 생각하니까 마땅히 떠오르는 데가 없어. 그래서 송광사 관음전에서 백일기도를 했어요. 그러고 나서 천은사 가서 결제結制를 하고 사는데, 입선만 들어가면 산 넘어 조용한 칠불사 선방이 자꾸 떠오르는 거야. 그래서 기도 발원대로 칠불사로 가서 그곳에서 묵언수행을 7년 했죠. 끝나고 나니 같이 살던 스님들이 나가지 말고 3년 결사를 하자고 해서, 그래서 대중 모두가 3년 결사 정진을 하였죠.
목우가풍
스님은 굉장히 치열하게 수행을 하셨더라고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마음은 뭘까요?
나는 치열하게 한 게 아니야. 가장 기본에 맞게 성실하게 선 수행을 하였을 뿐이에요. 구도자의 기본은 원래 수행 정진이잖아요.
우리는 월요일마다 저 아래 도로까지 대청소를 해요. 예전에 내가 빗자루 들고 나가서 쓸고 오니 미국에서 온 현각 스님이 신기해하더라고요. 그때 내가 유나 소임을 봤는데, 방장스님 밑에서 총림 전체를 지휘 통솔하는 소임자란 말이에요. 현각 스님이 보더니 그 위치에 있으면서 직접 빗자루 잡는 게 놀라웠는지 “스님은 늘 같이 합니까?” 하고 물었어요.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니 “오, 굉장합니다.” 해요.
그래서 말했죠. “이것은 굉장한 게 아니고 가장 기본적인 거야. 부처님이 옛날에 탁발하실 때 제일 먼저 바리때 들고 나가셨잖아. 제일 먼저 솔선수범 보이셨잖아.
은사스님인 구산 스님도 초대 방장이 되어서도 늘 청소 시간에 제일 먼저 빗자루 들고 와서 쓰시고, 밭에 가서 울력할 때도 괭이 들고 가서 같이 일하셨다고. 불교 공동체에서 같이 움직이는 건 대중 생활의 기본이야.”
힘들 때도 적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 어떻게 위기를 넘기셨어요?
늘 서원을 세워야 해요. 힘들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에요. 공부에 진전이 없을 때, 그때가 참 힘들어요. 망망대해에서 배를 저어가는데 등대도 안 보이고, 나침반도 없고, 햇살은 내리쪼이는데 어디로 갈지 모를 때 있잖아요. 그럴 땐 법당에 들러서 참배하면서 자기 발원을 해야 돼요. “대자대비하신 삼보님. 자비심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제가 수행을 해서 마음의 등불을 밝혀 부처님의 크신 은혜를 갚고 일체중생을 유익하게 하겠습니다.
자비심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하면서 자꾸 그렇게 기도해야 해요. 자기 스스로가 채찍질하는 거지. 이것을 ‘자경自警’이라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 경책하는 것.
보조 스님이 ‘목우가풍牧牛家風’을 말씀하셨어요. 나는 처음에는 ‘아, 보조 스님은 목동이고 우리는 소구나. 눈 밝은 스님이 우리를 소처럼 경책하고 몰고 가는구나.’ 그렇게 생각했거든. 그게 아니야. 자기 스스로를 소처럼 생각하고 소를 키우는 마음으로 자기를 다스려 간다는 뜻이에요.
7년 동안이나 묵언수행 하셨는데, 보통 힘든 게 아니셨을 것 같아요.
처음 시작했을 때 얼마 동안은 꿈에서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러다 꿈속에서도 정신이 차려져서 ‘이거 묵언한다고 해놓고 말을 했으니 대중 앞에 참회해야 하네. 아 창피한데….’ 하다가 꿈에서 깨어나면 ‘꿈이었네, 다행이다. 조심해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게 6개월 가요. 6개월 후에는 꿈속에서도 누가 말을 걸면 ‘묵언’이라고 적어주고 말을 안 하게 돼요. 현실과 꿈속에서도 말을 하지 않을 때 제대로 묵언이 되는 거지요. 나와 같이 시작해서 묵언수행을 3년 한 도반이 있었는데, 끝나고 차 한잔 먹으면서 얘기했는데, 자기도 처음에는 꿈에 말을 해서 ‘아 큰일 났다.’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6개월이 지나니까 꿈에서도 묵언이 되더라는 거야.
우리의 잠재의식이 그만큼 애를 씁니다. 업이 있으니까. 꿈은 잠재의식의 활동이잖아요. 잠재의식에는 모든 기억이 입력되어 있다고 해요. 그게 업이죠. 우리가 습관을 교정하려 하면 현재 의식 수준에서는 아무리 다짐해도 뿌리가 있기 때문에 상이 또 올라와요. 결심을 하고, 다짐을 했더라도 또 업이 자라납니다.
불교에서 보면, 6식識의 경계가 현재 의식이에요. 잠재의식은 불교로 말하면 제8 아뢰야식 수준이죠. 제7 말나식 수준 밑에 아뢰야식 수준이 있는데, 내 본능적인 업이 다 거기 들어있어요. 업의 뿌리가 3단계까지 내려와 있으면 더 깊이 들어가서 4단계에서 정말 간절하게 서원을 하고 다짐을 해야 그 뿌리를 뽑아낼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위 단계에서 다짐하면 아무리 해도 풀만 뜯어내는 거지 뿌리를 뽑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 또 재발되는 거예요. 백일기도를 하면 그만큼 잠재의식 속에 좀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화두도 마찬가지예요. 자꾸 몰입하다 보면 무의식 깊이 들어갈 수 있어요.
마음 번뇌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
묵언을 스스로 지키는 것도 힘드셨겠지만, 같이 사는 대중들과 지내면서도 불편한 일이 많았을 것 같아요. 어떻게 대처하셨어요?
나도 불편하지만 대중들도 불편하겠죠. 놀리려고 툭 치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고, 신발을 숨겨놓고 공양하러 가는 사람도 있고. 장난꾼들이 그러지. 친한 도반들이잖아요.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럴 때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로 자기 자신을 잘 다스려야 해요.
자기를 돌아봐야 해요. 그게 순서예요. 경을 읽어도 자기 마음속에 자심반조自心反照가 되어야 이익이 있잖아요.
그럴 때는 내 스스로 돌아보면서 “내가 전생에 저 사람들을 많이 괴롭히고 애를 먹였던가 보다. 그래서 이런 업을 받는구나.” 그러면 원망 안 하고,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게 되지. 다시 같이 어울리고 지낼 수 있게 되지. 묵언이라는 건 어떤 시비분별에서도 묵묵히 인욕하겠다는 거잖아요.
법정 스님이 가끔 편지를 보내셨어요. 법정 스님은 박식하셔서 얘기를 나누면 경전에 나오는 말씀이든지 옛날 조사 어록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해서 들려주셨어요. 그걸 들으면서 깨우침을 얻었지요. 햇차를 보내드리면 붓글씨로 쓴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이렇게 써주셨더라고요. “대중과 함께 살 때에는 대중 모두를 선지식으로 모시고 살면 큰 이익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참 좋은 교훈이 되었어요. 현실에서도 우리 모두가 새겨볼 가르침입니다.
스님께서는 방장스님으로서 지금 수행하는 스님들에게는 가장 큰 스승님이시잖아요. 그리고 재가자들도 수행하러 오거나 한 말씀 듣겠다고 오거나 하잖아요. 수행자들한테 말씀하실 때와 재가자에게 말씀하실 때는 다른 얘기를 하시나요?
차이는 나지만 본질은 같아요. 좀 쉽게 풀어주는 것뿐이지. 처음에 구산 스님을 찾아와서 인사를 드렸을 때, 스님이 웃으면서 “이 세상에 가장 소중한 게 뭐냐.”고 묻더라고요. 출가한 사람이 출세라든가 부귀 같은 것 이야기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가만히 생각한 다음 그랬어요. “마음의 평화가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은 어떻게 생겼는고.” 하더라고. 꽉 막히더라고. 마음을 알아야 평화를 갖출 수 있지. 마음도 모르면서 어떻게 마음의 평화를 원할 수 있겠나 싶었지요.
그러니 구산 스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수행이라는 것은 마음을 찾는 것이라고. 그 마음을 찾아야 거기에 평화를 장엄할 수 있지 않느냐고. 그게 확 와닿더라고요. 실제로 수행자도 재가자들도 다 마음의 평화를 원하잖아요.
수행은 앞도 생각하지 말고 뒤도 생각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딱 자기를 찾는 거예요. 군대 가도 마찬가지예요. 군대는 한 사람만 잘못해도 부대 전체에 기합을 줘요. 그날 저녁에 기합받을 생각을 하니까 불안한 거지.
내가 그때 고참에게 물어봤어. “그럴 때의 군인정신은 어떤 것입니까?” 그랬더니 우리 선사들하고 똑같이 얘기하더라고. 선사들도 그러거든. 1분 전 얘기도 생각하지 말고 1분 후의 일도 생각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내 정신 하나를 딱 챙기라고 하거든. 그런데 그 군인도 그러더라고. 5분 전에 있었던 것도 생각하지 말고 5분 후에 올 것도 생각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있는 것, 그것에만 딱 몰입하라는 거지. 나중에 올 일은 걱정하지 마라. 그때의 그 명철한 답이 가슴에 와닿았어요.
평안한 마음이 되거든, 좌우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중심을 잡을 수 있단 말이에요. 수행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이 순간에만 오직 일념을 딱 챙겨가는 것. 그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고 우리 마음의 번뇌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에요.
현묵 스님 조계총림 송광사 8대 방장. 1971년 송광사에서 구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후 구산 스님을 계사로 1972년 사미계와 1976년 비구계를 수지, 1975년 수선안거 이래 90안거를 성만했다. 1983년부터 지리산 칠불사 선원에서 10년간 산문을 나오지 않고 참선 수행하며 7년의 묵언 정진과 3년의 결사 정진을 대중과 함께 마쳤다. 1998년부터 2022년까지 송광사 유나, 2023년부터 송광사 수좌, 수련원장을 맡아 후학을 제접했다. 2025년 3월 26일 조계총림 송광사 8대 방장으로 취임했다.
박사 북칼럼니스트. ‘불교덕후’로도 유명하다. 방송과 일간지 등 다양한 매체 를 통해 책과 문화를 소개해 왔으며, ‘책 듣는 밤’, ‘책 듣는 저녁’으로 대중과 만났다. 『나에게, 여행을』, 『가꾼다는 것』, 『치킨에 다리가 하나여도 웃을 수 있다면』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