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역설
눈이 내리면, 우리는 걷는 법을 다시 배운다. 보폭을 줄이고, 속도를 낮추며, 바람의 결을 느낀다. 그 순간 몸은 겸손을 기억한다. 걸음의 속도가 마음의 속도와 일치할 때, 세상은 잠시 수행 도량이 된다. 눈 위에 남긴 발자국은 곧 다시 눈에 덮인다. 덮임과 드러남, 생멸의 리듬이 발밑에서 고요히 이어진다. 찰나마다 태어나고, 찰나마다 사라지는 세계의 숨결이 그 안에서 들린다.
나는 아무 연고 없는 광주에서 일 년을 살다 얼마 전 서울로 돌아왔다. 올해 광주는 자주 흐렸고, 예고 없이 비가 오고, 진눈깨비도 폭설도 자주 내렸다. 첫눈이 내린 날에는 온종일 음악을 들었다. ‘첫눈’이라는 말엔 감정의 전류가 흐른다. 매년 오는 눈이지만, 매번 처음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반복 속의 처음, 그 역설이 주는 통찰은 깊다. 우리는 끝없이 되풀이되는 일상에서도 ‘처음처럼’ 보는 눈을 잃지 않아야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초심初心은 그 능력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첫눈을 기다리는 마음은 날씨보다 감각의 회복을 기다리는 일이다. 누군가는 첫눈에 약속을 걸었다. 만남을 정하고, 화해를 도모하고, 관계의 시작과 끝을 기념한다. 우리는 자연의 리듬을 사회적 리듬으로 번역하며 산다. 그 번역의 순간, 눈은 우연에서 의미로 옮겨간다.
내가 머물던 곳은 광주 광산구였다. 오래전 가장 가난했던 지역이라 했다. 산업단지가 가까이 있었고, 자주 몸이 아팠다. 한 스님의 추천으로 그곳에 자리 잡았지만, 교통이 불편했고 창문 너머로 종종 역한 냄새가 넘어와 호흡기를 걱정하는 날도 있었다. 그런데도 눈이 오면 마음이 밝아졌다. 창밖의 하얀 풍경은 많은 것을 덮어주었고, 세상은 잠시 고요해졌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는 하나같이 다르다. 구름 속에서 물방울과 얼음 입자가 수증기를 두고 경쟁한다. 물방울은 증발하고 얼음은 자란다. 눈은 경쟁의 결과가 아니라 균형의 산물이다. 서로 다른 상태가 공존할 때 비로소 한 송이 눈꽃이 완성된다. 모든 존재가 그러하듯, 세상은 관계의 고리로 이어져 있다.
아무도 눈의 발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어느새 세상은 하얗게 변한다. 그 흰빛은 우리를 깨끗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다만 모든 소리를 낮추게 한다. 어제의 상처도, 다툼도, 미련도 눈 속에서는 제빛을 잃고 희미하게 가라앉는다. 창가에 서서 멀리 있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함께 걷던 골목, 함께 머물던 옥상에도 지금쯤 흰빛이 쌓이고 있겠지. 그 생각만으로 이상하게 마음은 덜 아팠다. 살다 보면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 미워했던 일, 후회했던 말, 그때는 그것이 전부였던 순간들. 눈은 그런 마음의 언저리를 조용히 덮었다.
하얀 눈의 표면은 곧 먼지와 흙, 발자국과 검댕을 받아들여 얼룩이 된다. 그 얼룩은 청정淸淨의 파괴가 아니라, 청정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다. 분별이 멈추고 깨끗함과 더러움이 서로의 그림자가 되어 흐르는 장場. 눈의 표면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듯, 수행 또한 걸러낸 순수가 아니라 포용을 지향한다. 눈은 모든 것을 덮으면서 동시에 무언가를 더욱 또렷하게 드러낸다. 나무의 골격, 지붕의 기울기, 길의 경사. 평소 보이지 않던 세계의 구조가 그때야 비로소 부상한다. 계속되는 눈발은 시야를 가리지만, 습자지처럼 도시의 불빛을 퍼뜨려 부드러운 조명을 만든다. 자동차 소음은 눌리고, 세상은 한층 고요해진다. 그때 우리는 문득 깨닫는다. 자기 마음이 얼마나 시끄러웠는지를. 도시의 리듬이 멈추고,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들어 동시에 하늘을 본다. 그 짧은 동시성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공통 감각이다. 우리는 타인과 함께 잠시 멈춘다. 모든 것은 덮이고, 덮이는 순간 사라진다. 수행이란 어쩌면 그 사라짐의 연습일지도 모른다. 스님들은 눈을 ‘무상의 자비’라 부른다. 모든 것을 덮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
붙잡음 없이 존재하는 생의 한순간, 눈은 발등 위에서 사라지며 진리를 보여준다.
눈 내리는 산사는 말보다 먼저 고요가 도착하는 곳이다. 장성 백양사에서 보낸 지난겨울이 떠오른다. 새벽예불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으면, 옆방 젊은 처사는 야간 경비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그는 대웅전 마당에 격자 모양의 길을 내느라 한참을 더 밖에서 머물렀다.
아침 공양 후, 사부대중은 모두 대빗자루를 들고 경내를 쓸었다. 주간 처사는 송풍기로 큰길의 눈을 치웠고, 템플스테이 참가자들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울력에 동참했다. 예전엔 스님들이 울력도 수행이다, 함께 움직이는 것이 선이다, 라며 그 의미를 풀어주곤 했는데 요즘은 프로그램 속 짧은 체험으로만 남아 그 맥락을 전하기 어려워졌다. 노동이 이미 일상에서 과잉된 현대인에게, 울력은 휴식 속의 또 다른 일로 다가갈 수도 있다.
그런데도 고단한 몸을 일으켜 울력에 참여하는 이들이 있었다. “눈을 치운다는 건, 자기 마음을 닦는 일이요.” 수좌 스님의 한마디가 참가자들에게 가 닿았다.
눈은 덮이고, 쓸리고, 다시 덮이는 무한한 순환의 수행이 되었다.
한 참가자가 말했다. “끝없이 내리는 흰 것은 밖이 아니라, 제 안에 내리고 있었어요.”
번뇌의 눈, 욕망의 눈, 기억의 눈. 그 모든 눈을 쓸어내도, 여지없이 다시 내린다고 했다. 눈을 치우는 일은 결국 자기 마음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마당에 나섰다. 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낮에 쓸어낸 자리는 이미 새 눈에 덮여 있었다. 허무하다는 생각 끝에 문득 웃음이 났다. 마음의 번뇌도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온다.
밤이 깊어지자 절은 다시 하얗게 잠겼다. 멀리서 풍경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치워도, 누가 내버려두어도, 눈은 자기 일을 계속했다. 덮고, 지우고, 또 덮었다. 눈은 자신이 내려앉은 곳을 기억하지 않았다.
지붕의 흰 자락, 나무우듬지, 사람의 어깨 위에 잠시 앉았다가 사라지는 순간. 그 짧은 머묾 속에서 세상은 조금씩 변했다. 눈이 녹으면 물이 되고, 물은 다시 땅으로 스며들어 풀을 키우고 꽃을 피운다. 우리의 슬픔과 기쁨도 그 순환의 일부다. 내려서 사라지는 것, 덮으면서도 지우지 않고, 사라지면서도 남는 것. 진정한 자비란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세상을 구원하려 하지 않고, 그저 흰빛으로 잠시 덮어줄 뿐. 결국 모든 것을 하나의 빛으로 돌려놓는다.
눈은 한 생을 끝내며 다음 생을 준비한다. 그 순백의 윤회 속에서 모든 존재는 자신이 흩어질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그 흩어짐이야말로 세상에 머무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이다.사라지는 것만이 세상을 이어준다는 것을. 모든 것은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 공空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관계로 가득한 충만이다. 눈은 그 관계의 완벽한 비유다. 모든 사물 위에 차별 없이 쌓이고, 모든 사물 속에 다르게 녹는다. 순수는 고립 속에 있지 않고, 연기의 그물 안에서 유지된다. 그러므로 눈의 청정은 세속을 거부하는 무결함이 아니라, 세속을 받아들이는 투명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