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아래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큰 돌
석축과 계단
인류가 동물과 달라진 분기점은 도구를 사용하고 불을 이용하게 되면서부터다. 인류가 처음으로 손에 잡았던 도구는 바로 돌이었다. 구석기시대에는 돌을 깨서 도구로 썼고, 신석기시대는 돌을 갈아서 썼다. 한반도에는 산도 많고 돌도 많아, 어딜 가나 야물고 단단한 화강암이 흔하다. 그리고 우리 선조들은 이 화강암으로 고인돌을 조성했다. 청동기시대 조성된 고인돌이 한반도에만 약 4만 기基가 남아 있을 정도인데, 그 모양이 독특하고 독자적이며 집중적 형태여서 화순, 고창, 강화도의 고인돌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돌을 다뤄온 이런 기술은 불교가 들어온 이후 석탑을 조성하고 석불을 깎고 석등, 당간지주를 만드는 데에 노련하게 활용되었다. 단단한 화강암으로 영원을 기약한 것이다.
부석사 석축, 자연석과 장엄함의 극치
한반도는 산이 많은 지형이기에 산 중턱에 건물을 세우려면 경사진 터에 석축을 쌓아 평탄하게 만드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석축石築은 말 그대로 돌로 쌓은 축대다. 선조들은 자연과 어우러지면서도 눈이 편한 석축을 쌓기 위해 고심했다. 그 대표적인 석축이 바로 영주 부석사의 대석단大石壇이다. 얼핏 보면 큰 자연석 돌을 막 쌓은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얼마나 세심하게 쌓았는지 알 수 있다. 부석사 대석단은 덩어리가 큰 막돌이 쌓여있되 서로 이가 맞물려 있고, 막돌과 막돌 사이 공간에는 잔돌들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석축의 맨 위를 덮는 갑석甲石은 위쪽을 평평하게 가공하고 아래쪽 면을 석축에 맞추어 수평이 되도록 했다.
큰 특징으로는 석축의 옆면이 함부로 튀어나온 돌이 없이 고르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석축 벽면을 고르게 맞추기 위해 석공들은 얼마나 고심했을까? 자연적인 석재가 주는 장엄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석축이 바로 부석사의 대석단이다.
미감을 극대화한 불국사 석축
한편, 불국사의 대석단은 자연석과 잘 다듬은 장대석(長臺石: 섬돌 층계나 축대에 쓰이는 길게 다듬은 돌)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미감을 극대화한 석축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국사는 통일신라의 재상 김대성이 751년(경덕왕 10)에 짓기 시작했으나 완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국가가 나서서 774년(혜공왕 10)에 완공한 사찰이다. 신라문화의 최전성기에 건립된 사찰로 완성까지 무려 23년이 걸렸다. 그 시간만큼 완성도가 높은 사찰이다.
불국사는 경사진 산기슭의 남쪽 면을 다듬고 가구식 석축(架構式 石築, 보물)을 높이 쌓았다. 석축을 중심으로 석축 위는 부처님의 세계이고 석축 아래는 중생 세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석축에는 위와 아래를 잇는 두 개의 다리가 있는데, 청운교와 백운교이다.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두 다리는 정교하고 아름다워 일찍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가구식 석축을 살펴보면 그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데, 석재를 다듬어 세로 기둥을 세우고, 가로 기둥으로 연결해 조화롭게 쌓은 형태를 볼 수 있다. 세로 기둥과 가로 기둥 사이의 면은 자연석으로 채웠다. 자연이 갖는 자유로움과 인공의 솜씨를 조화롭게 엮은 것이다. 특히 자연석과 인공의 장대석이 맞닿는 부분의 솜씨가 단연 돋보이는데, 자연석으로 쌓은 석축 위에 수평의 장대석을 얹기 위해 장대석의 아랫부분을 자연석의 굴곡과 맞아떨어지도록 깎았다. 주춧돌 위 기둥을 세울 때 돌의 굴곡에 맞게 깎아내는 그랭이 공법을 축대에 적용한 것이다. 이미 조성한 지 1,200여 년이 지난 석축과 계단이 각각 보물과 국보로 지정되었으니 그만큼 귀하고 아름다운 문화재다.
건물의 품위를 높이는 기단부
법당이나 주요 건물을 보면 평지보다 조금 더 높은 위치에 짓고자 석축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때 쌓은 석축을 기단부라 부른다.
불국사는 몽골과의 전쟁 때 화마를 입었고, 임진왜란 때도 석조물만 남고 대부분의 목조 건물이 전소됐다. 그때마다 가람을 복구하고 중건했으니 본래 건물 모습은 알 수 없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석물뿐이다. 곧 석축은 맨 밑자리에서 묵묵히 옛 모습을 지키고 있는 귀한 유물이다. 그래서 수많은 절터에 남아 있는 기단부를 살펴보면 어느 시대의 유물인지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불국사 대웅전 기단부는 가구식 석축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불국사 대웅전 기단부에는 주춧돌과 주춧돌 사이에 길게 가공한 석재가 끼워져 있다. 이는 신라시대 건축의 특징으로, 건물의 하부 목재가 지면에 바로 닿아 부식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다. 절터에 이러한 유물이 있다면 신라시대 절터로 보면 되는데, 포항 보경사 적광전, 괴산 각연사 비로전에도 남아 있다.
불국사 대웅전 석축 기단은 맞은편 석가탑의 기단부처럼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판판하고 넓은 면석(面石: 벽면 역할을 하는 돌)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기단부 위의 빗물이 면석에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면석 아래, 땅에 직접 닿는 지대석(地臺石: 수평으로 놓아 전체 구조를 받치는 돌)과 면석 위를 덮는 갑석(甲石: 면석 위를 덮어 기단을 완성하는 상부 돌)을 면석보다 더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기단부 귀퉁이도 귀퉁이 갑석이 쉽게 떨어져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ㄱ’자 형태로 깎아서 덮는 기술을 적용했다.
이러한 기단부 형태도 전형적인 신라양식이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보은 법주사 팔상전도 이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고, 불국사 경내의 극락전이나 비로전, 관음전도 같은 양식이다.
석공은 얼마나 많은 공력을 기울였을까
불국사 관음전 뒤의 서쪽 기단부 귀퉁이 갑석은 자세히 살펴보면 갑석의 꺾어지는 부분이 한옥의 추녀선처럼 살짝 올려서 다듬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석재로만 마감된 기단부가 무겁고 경직돼 보이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날아오르는 듯한 한옥 추녀선을 차용한 것이다. 저 추녀선 하나를 살리기 위해 석공은 또 얼마나 많은 공력을 기울였을까?
이 관음전 귀퉁이 갑석의 모습이 다른 법당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이로 미루어 관음전은 다른 법당보다 늦게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김천 수도사 대적광전 기단부나 합천 영암사지 금당 기단부에서도 이 모습을 볼 수 있다. 불국사 기단 양식이 지방으로 전파되어 나간 흔적이라 할 수 있겠다.
시간의 흐름과 다양해지는 기단부
고려시대가 되면 기단부에도 변화가 온다. 기둥과 면석이 사라지고 가공된 돌을 쌓는 방식도 등장한다. 사각의 긴 장대석을 가로로 첩첩이 쌓는 방식도 나온다. 가공된 돌을 쌓지만 자연스럽게 미감을 살리기에 보기에도 편안한 느낌을 준다.
춘천 청평사 회전문과 청평루의 기단부와 현풍 금화사 터에 세워진 도동서원 중정당의 기단부는 마치 조각보를 깁듯이 하나하나 짜맞추어 추상 작품을 보는 듯 세련되다.
고려 말기로 갈수록 법당 기단부는 긴 장대석을 줄 맞추어 쌓는 방식이 대세를 이룬다. 이런 양식은 조선 초까지 이어진다. 그래도 갑석을 약간 튀어나오게 설치하고 갑석의 아랫면을 약하게 한번 접은 방식이 많다. 춘천 청평사 대웅전 기단부나 양주 회암사지 기단부에서 볼 수 있다. 조선 초기에 대대적으로 중창된 남양주 봉선사 대웅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 후기로 들어서면 법당의 기단부가 일정한 크기의 장대석을 겹쳐 쌓는 방식으로 바뀌고 갑석이 튀어나오는 것도 사라진다. 정조가 지은 수원 용주사 기단부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기단부를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 막돌로 쌓은 방식도 많이 나타나는데, 유교가 국가 이념의 중심이 되고 불교가 밀려나자 사찰의 재정이 약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양식이라 하겠다.
계단에도 역사가 있다
석축에 역사가 있듯이 계단에도 역사가 있다. 기단부와 연결된 계단만 보아도 어느 시대에 조성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신라시대 석조계단의 백미는 역시 불국사의 법당 계단이다. 이 시대 계단의 특징은 계단을 양쪽에서 막고 있는 소맷돌(돌계단 난간: 옆막이돌 또는 계단우석)이 계단을 따라 낮게 사선으로 내려간 후 앞으로 약간 돌출된 형태다. 단순하고 소박하다.
불국사 대웅전의 계단을 보면 소맷돌이 ‘’형 모습인데, 소맷돌 바깥면을 윤곽선을 따라 안쪽으로 이중으로 깎아 놓았다. 그냥 평면으로 처리하면 밋밋하고 단조로웠을 것이다. 특히 소맷돌 윤곽선을 자세히 살펴보면 앞쪽이 살짝 들려있는데, 마치 버선처럼 단정한 콧날이 이중으로 가볍게 올라갔다. 이 윤곽선을 직선으로만 파내었다면 당연히 경직되고 딱딱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솜씨 좋은 석공은 이처럼 유연한 선 처리로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석조계단을 가볍게 받쳐 든 듯한 경쾌함을 선사한다. 소맷돌 바깥면을 윤곽에 따라 이중으로 깎아 장식한 계단 양식은 신라 고유의 양식으로 영주 부석사 대웅전 계단이나 원주 거돈사지 계단에서도 만날 수 있다.
소맷돌의 시대별 변천사
신라 말이 되면 사선으로 내려왔던 소맷돌이 조금씩 둥글어지기 시작한다. 그런 유물이 보령 성주사지에 있다. 성주사지는 신라 말기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성주산파가 자리했던 곳이다. 그 터의 석조계단을 보면 약하게 둥글어진 소맷돌도 있고 둥근 소맷돌 앞에 사자를 안치한 계단도 있다.
고려시대로 넘어오면 계단의 소맷돌도 좀 더 부풀어 오른다. 소맷돌 위쪽이 반원형을 그리며 내려가고 소맷돌 앞쪽에 북처럼 둥글게 마감한 모습이 나타난다. 양주 회암사지나 춘천 청평사 대웅전, 안성 칠장사 대웅전 계단 등에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반원형 소맷돌은 그대로 전승되지만 소맷돌 앞머리가 서서히 용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임진왜란 후에 복원한 법당에는 화재방지를 위해 법당 내외부에 청룡, 황룡 조각을 설치하는 양식이 유행하게 되는데 석조계단에도 이 용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석조 계단에 용이 등장하면서 법당 전체를 중생을 싣고 극락으로 가는 반야용선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소맷돌 외부의 조각도 다양해져서 용, 연꽃, 구름 문양 등이 다채롭게 등장하기도 한다. 1761년(영조 37)에 완공된 속초 신흥사 극락보전의 석조계단이 대표적이다. 여수 흥국사 대웅전 계단은 용을 네 마리나 배치했다.
이처럼 석축이나 계단을 통해서 시대별 양식의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건물도 있지만, 옛 시절을 보듬으며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석축이나 계단도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