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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핀 한 송이 연꽃 속에

고성 옥천사-청련암, 백련암, 연대암

글. 황유원

사진. 하지권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입동이 지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고성 옥천사로 떠나는 길을 나섰다. 마침, 수능 날이었지만 수능 한파는 없었고 하늘은 더없이 맑고 파랬다. 단풍도 절정이어서 이런저런 일로 조금 지친 마음을 달래러 가기 딱 좋은 날씨. 일부러 잡으려 해도 잡기 어려운 길일이 아닌가.

반쯤 핀 연꽃 봉우리에 둘러싸인 절

우선 진주역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으로 향한다. 빈자리가 나서 앉으니 옆자리 분이 손바닥만 한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한다. 힐끗 보니 『천수경』이다. 천수천안의 저 무량한 자비의 손과 지혜의 눈. 내 손에는 한병철의 『선불교의 철학』이 들려 있다. 책에는 하이쿠가 계속 인용되는데, “하이쿠는 욕구가 없는 까닭에 기도 혹은 그리움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구절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이번 여행을 떠나는 내게는 어떤 욕구가 있는가?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먼 길을 떠나는 만큼 무언가 얻어와야 하지 않겠나 하는 막연한 생각이 점차 또렷해진다. 그 생각을 애써 지워보려 한다. 아니, 저절로 지워질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두기로 한다.
그때 옆자리 분이 내가 불교 관련 서적을 읽는 걸 눈치채시고는 살짝 웃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급히 내리는 바람에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도시에서 낯선 이들 사이의 교감은 때로 그렇게 수줍고 미묘하게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런 식의 말 없는 대화가 오히려 더 불교적이었달까. 마음에 드는 여정의 시작이다.
진주역에 내려 차를 타고 옥천사로 향한다. 서너 시쯤 되었을 뿐인데 벌써 좀 어둑해진 숲길을 지나니 작은 다리가 나온다.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니 ‘극락교’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이 다리를 넘어가면 곧 극락이라고 말하는 건 과장이겠지만, 그래도 무방비 상태에서 본 ‘극락교’라는 말은 ‘아!’ 하고 즉각적인 탄성을 내뱉게 한다.
옥천사는 듣던 대로 연꽃이 반쯤 핀 형상을 일컫는 ‘반개연화半開蓮華’의 봉우리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주지스님인 진성 스님께서는 이미 밖에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스님께 합장하고 함께 요사채로 향한다. 스님께서 직접 우려주신 연蓮차를 마시며 나누는 대화는 자연히 ‘연화산’과 ‘옥천사’라는 명칭과 그 둘의 관계로 이어졌다.
“어느 절에 가도 산 이름과 사찰명은 연관 관계가 있어요. 원래 옥천사가 화엄십찰 중 하나라서 화華 자를 쓰긴 했지만, 의상 스님 이후로 1,300년이나 지났는데 누가 봤나? 연꽃은 말할 것도 없이 불교의 상징인데, 연꽃이 피어나려면 물이 있어야지. 십몇 년 전에 서부 경남이 가물었을 때, 쌍계사 계곡이 마르고 고성의 크고 작은 저수지가 전부 바닥을 드러냈을 때도 여기는 물이 계속 흘렀어요.”
스님께서 연꽃과 물 이야기를 하시는 동안 나의 손은 계속 연차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말씀 속의 연꽃과 물이 이 차 한 잔에 다 들어 있지 않나! 연차가 귀로도 입으로도 들어왔다. 각기 들어온 곳은 달라도 연꽃과 물이 도달하는 곳은 한 곳인 듯했다.
“내가 어려서 들어왔을 때는 샘이 네 군데였다고 해. 지금은 물이 나는 곳이 세 군데인데 나머지 한 곳인 장군샘은 대중들이 물을 마시고 몸이 건강해져서 사고를 많이 쳤다지. 무슨 사고였는지는 나도 몰라.”
좌중에서 웃음꽃이 피어난다. 어쨌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장군샘을 메웠는데 어차피 물이 나는 곳이 많으니 한 곳쯤은 없애도 괜찮았다고. 그만큼 옥천사에는 원래 물이 끊기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 말을 들으며 차를 마시다 보니 옥천사라는 이름이 더 힘찬 물소리를 내며 가까이 와 닿는다. 스님이 우려주신 차의 물도 당연히 옥천사의 샘물이다. “어디 가서 차를 마셔봐도 이곳 물만 못하다.”라는 말씀에서 옥천사에 대한 자부심이 물씬 묻어난다. 그 물 위로 여기저기 연꽃이 피어 있다. 청련암과 백련암, 그리고 연대암까지 암자 이름에 모두 ‘연꽃 연蓮’ 자가 들어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암자가 열두 개 있었는데 거의 다 소실되고 지금은 이 세 암자가 남아 있다고.

보살의 삶 무엇이며 어찌 실천하오리까

저녁 공양을 마친 후 청련암 감원스님이신 원명 스님의 안내로 곧장 청련암에 오른다. 안으로 들어가니 우선 마당 한쪽에 놓인 철제 솥이 보인다. 무슨 솥이 이렇게 큰가 했더니, 옛날에 임금이 사용하는 어람용 종이를 만들 때 사용했던 것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사찰에 계신 스님들이 종이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어요. 직접 목판을 새기고 한지에 찍어서 경전으로 만들어 공부하셨으니까. 옥천사는 최고급 한지를 만드는 절이었는데, 나라에서 할당량을 너무 과하게 부담했어요. 족보를 만들던 지역 유생들의 수탈에도 시달리고. 그렇게 백 년 동안 어려움을 많이 겪었죠.”
그런 고된 역사의 산증인이나 마찬가지인 솥은 이제 편안히 앉아서, 거기 고인 물로 바로 옆에 있는 ‘겨우 이백 년’밖에 안 된 어린 은행나무를 비추고 있다. 내 얼굴도 한번 비춰본다. 잘 비친다. 하지만 흔적은 남지 않는다.
청련암의 주련은 한글로 되어 있었다. 주련을 교체해야 했을 때 요즘 사람도 읽을 수 있는 한글로 교체했다고 한다. 그런데 주련의 문장이 동국대 인도철학과 김호성 교수님의 문장이라는 이야기에 깜짝 놀란다. 뵌 지 꽤 됐는데 여기서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옥천사에 간다고 했을 때 마산 출신인 아버지께서 “외증조할머니가 옥천사에 가서 찍으셨던 사진이 기억난다.”고 하셨던 말이 떠올랐다. 외증조할머니라니,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원명 스님께 그 이야기를 들려드렸더니 스님도 충남 부여 출신이지만(스님의 말에 따르면 “자랑스러운 백제인!”) 사실 본本은 진주라고, “어떻게 돌고 돌아서 본향으로 돌아온 것 같다.”라고 하신다. 이런 게 바로 업의 위력일까.
이튿날은 새벽 예불로 하루를 시작한다. 실은 전날에 대웅전을 방문하지 못했는데, 새벽 예불이 대웅전을 방문하는 첫 순간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떨려서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대신 아미타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삼존불 아래에는 똑같이 ‘일체중생성정각一切衆生成正覺’이라고 쓰여 있다.
주지스님께서 직접 집전해주시는 새벽 예불에 정신이 맑은 연꽃처럼 ‘올바른 깨달음’을 향해 스르르 벌어지는 듯하다. 대웅전 바깥으로 나와 눈이 어둠에 적응할수록 새까만 하늘에 별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실은 원래 늘 거기 있던 별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공양을 마치고 다시 원명 스님의 안내로 경내를 둘러본다. 명부전, 칠성각, 조사전, 독성각, 산령각, 나한전 등등 모두 잠깐 보고 가기에는 아까울 만큼 장엄했다. 특히 산령각은 들어가 예불을 드릴 수도 없을 만큼 작았는데, 어쩐지 젊은 불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되 좁지 않고 아늑한 그곳이 못 견디게 좋았다고 말하면 너무 속인 같은 말일까.
그 유명한 옥샘도 둘러본다. 예전에는 옥샘각에 ‘번뇌를 태우는 옥샘’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청룡이 그려져 있다. 파란 바가지로 물을 떠서 마셔본다. 번뇌를 태운다는 자세로 마시니 더욱 시원하다.

꽃을 피워 놓고 남을 기쁘게 하는 마음

한때 서부 경남에서 가장 유명한 암자 선원 중 한 곳이었다는 백련암으로 가는 길. 원명 스님께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떼신다.
“만행萬行이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일상생활의 만 가지 행동이 전부 수행이라고 하죠. 큰 스님들이 포행하거나 화두를 챙기며 걷던 그런 길이 아니었나 싶어요.”
여기서 큰 스님이란 성철 스님, 서옹 스님, 관응 스님, 혜암 스님 같은 분들을 말하는 것일 텐데, 내게는 그 말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처럼 들렸다. 원명 스님께서도 지금 그런 마음으로 이 길을 걷고 계시지 않을까.
예전보다 더 커진 청련암과 달리 백련암은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잠시 스님과 백련암 앞에 앉아 내리쬐는 햇살 속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여기도 은행나무가 있다. 청련암에서도 보이던 그 은행나무를 바로 눈앞에서 보니 감회가 새롭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좀 더 거리가 있는 연대암. 주지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연꽃의 ‘대’에 해당하는 암자다. 지금은 ‘연화리’라고 불리는 ‘연지蓮池’가 이 거대한 연꽃의 뿌리인 셈인데, 그곳은 이제 물이 없으니 이번 여행의 종착지는 연대암인 셈. 연대암 또한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는데, 외딴곳에 있으면서도 잘 정돈되어서 그런지 더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이 포근함은 처음 옥천사를 찾았을 때 연차를 마시며 느꼈던 감정이 아닌가. 옥천사에서 1박 2일을 보내는 동안 연꽃의 봉오리 안에 넣어서 재워두었다던 녹차처럼 포근히 안겨 있다가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연대암을 나선 후 원명 스님과 길 위에서 헤어진다. 각자 차에 타기 전에 작별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서로 다른 길로 갈라서니 비로소 헤어진 기분. 아무래도 아쉬웠지만 멈추지 않고 헤어져서 그런지 그게 꼭 진짜 헤어짐처럼 느껴졌다.
서울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원명 스님께서 주신 다포를 펼쳐보니 청담 스님의 ‘마음의 노래’가 정갈하게 적혀 있다. “꽃을 보고 기뻐하는 것보다는/ 꽃을 피워 놓고/ 남을 기쁘게 하는 마음/ 이것이 곧 자비의 마음씨다”라는 마지막 연에 마음이 흔들린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내가 고민했던 것은 ‘나의 욕구’를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그런데 여행을 마치는 길에 본 문장에는 ‘나’가 아닌 ‘남’이 있었다. 남을 기쁘게 하는 마음 앞에서 나는 거의 없어지거나 반대로 아주 커져서 세상 자체와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그곳에 ‘나의 욕망’ 따위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런 작되 좁진 않은 깨달음. 그것이 오늘 내 안에 핀 한 송이 연꽃이다.

 

황유원 2013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 시인이자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하얀 사슴 연못』 『초자연적 3D 프린팅』 『세상의 모든 최대화』 등이 있 으며, 『모비 딕』 『폭풍의 언덕』 『슬픔에 이름 붙이기』 등을 번역했다. 김수영문학 상, 현대문학상, 김현문학패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