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이겨내는 산사의 맛
부산 보덕사
만물이 생동하던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의 열매를 거두고 난 대지에
이른 서리가 내려앉는다. 다시 겨울이다. 겨울이 왔다는 건 순환의 주기가 또
한 번 마무리되어 감을 뜻한다.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위해 에너지를 모으는
시간이기도 하다. 바깥으로 휩쓸렸던 마음을 고요히 안으로
가져올 때다. 어쩌면 겨울은 수행자의 계절인지도 모른다. 새벽 찬바람에
산사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긴 겨울, 산사에서는 무얼 먹을까.
절기의 끝, 사색과 성찰의 계절
어느새 낙엽이 지는가 싶더니 낮의 길이가 부쩍 짧아졌다. 짧아진 낮의 길이만큼 밤은 더 길어지고, 밤의 고요 속에서 숨은 더 깊어진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서둘러 부산 보덕사로 향했다. 최저기온이 영하로 내려간 서울과 달리 부산의 겨울은 듣던 대로 비교적 포근했다. 그래도 겨울은 겨울인지라 산복도로로 들어서니 바람이 한결 차가웠다. 부산 금정구, 고도 317m의 나지막한 윤산輪山 중턱에 보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산 아래로 아파트가 내려다보이는 그야말로 도심 속 사찰이다.
사찰음식 장인 1급인 도림 스님이 보덕사 주지를 맡아 사찰을 이끌고 있다. 1987년 지형 스님을 은사로 청암사에서 출가한 도림 스님은 출가 전까진 음식 한 번 해본 적이 없었다. 전생의 인연인지 출가하자마자 곧바로 공양간에서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배운 적도 없는 조리법이 떠오르며 손이 저절로 음식을 만들고 있더란다. 그때부터 40년 가까이 사찰음식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대웅전에서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요사채 쪽으로 가니 장독대 옆 계단 아래 표고버섯을 말리는 모습이 풍경처럼 눈에 들어온다. 초겨울 한낮의 햇살과 부산의 바닷바람이 표고버섯의 맛과 향을 응축시키고 있을 테다.
“음식을 만들 때 채수와 고로쇠 간장이 중요해요. 깊은 맛을 내는 저만의 비법이라고 할까요.”
말린 표고버섯은 채수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그 외에도 무, 다시마, 배추, 청양고추, 콩나물 등을 넣고 끓여주는데 정해진 재료는 따로 없다. 채소 꼭지까지 버리지 말고 다 넣어서 진하게 우려내면 된다. 음식을 만들고 남은 채수는 나무에 뿌려준다. 버릴 것 하나 없는 자연 그대로의 순환이다.
자연이 아낌없이 베푼 음식을 도업을 위한 약으로 삼아 수행자는 사계절을 정진한다. 모든 것이 무상하듯 그런 삶 또한 언젠가 끝이 나고 다시 본래의 자연으로 돌아가리라. 어찌 수행자만 그러하겠는가. 낙엽이 진 마른 나뭇가지를 보고 있자니 절기의 끝에 다다랐음이 실감 난다. 겨울은 그런 계절이다. 바삐 걷던 걸음을 멈추고 걸어온 길을 한 번쯤 되돌아보게 하는 사색과 성찰의 계절.
오신채를 넣지 않은 절집의 김장 김치
세속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절집에서의 겨울나기 준비는 김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요즘엔 김장하는 집도 점점 줄어들고 김치를 사 먹는 일이 더 많아졌지만 절집의 사정은 다르다. 오신채와 젓갈을 넣지 않은 김치를 담가야 하기도 하고 대중이 함께 공양하는 절집의 특성상 김장은 필수다.
김장을 돕기 위해 도림 스님의 선·후배 도반스님들이 이른 아침부터 멀리서 보덕사를 찾았다. 직접 농사지은 배추로 백오십 포기 정도 담글 예정이다.
“예전에 청암사에서는 김장 때면 김치를 천 포기 이상 담갔어요. 밤 12시경부터 2시 사이에 절인 배추를 한번 뒤집어 줘야 했죠. 배추 뒤집기 소임을 맡은 십여 명의 스님들이 차가운 겨울밤에 천 포기 넘는 배추를 뒤집어야 했으니 얼마나 춥고 힘들었겠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패딩점퍼도 없어서 뼛속까지 벌벌 떨면서 했어요.”
천 포기를 담그던 시절에 비하면 백오십 포기는 소꿉놀이에 불과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배추 절이는 시간을 제외하고 정말이지 순식간에 김장이 끝났다. 모든 과정이 마치 각본을 짠 듯 신속 정확하게 ‘착착착착’ 진행됐다. 스님들의 노련한 손놀림과 최상의 합이 숨겨진 비결이랄까.
자연이 아낌없이 베푼 음식을 도업을 위한 약으로 삼아 수행자는 사계절을 정진한다. 모든 것이 무상하듯 그런 삶 또한 언젠가 끝이 나고 다시 본래의 자연으로 돌아가리라.
“먼저 배추를 소금에 잘 절여주어야 해요. 너무 많이 절이면 배추가 질겨져 맛이 없고 적당히 절여야 아삭하고 시원합니다.”
말이 쉽지, 언제나 그 ‘적당히’가 가장 어려운 법. 정확한 계량도 없이 감으로 절인다고 하는데 스님이 미리 절여 놓은 배추를 살짝 떼먹어보니 염도와 식감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말 그대로 딱 적당하다.
맛을 좌우하는 김칫소에는 절집 김치답게 독특한 재료들이 들어간다. 무채와 함께 오신채인 파와 마늘 대신 갓을 썰어 넣고 스님이 직접 만든 어성초 효소와 자두 효소, 개복숭아 효소, 생강청을 넣는다. 여기에 연근 죽이 들어가는데, 연근 가루를 쑤어 만든 연근 죽을 넣으면 몇 년이 지나도 배추가 무르지 않는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채수와 고로쇠 간장이다. 채수에 푹 삶은 늙은 호박을 넣어 단맛을 더하기도 한다.
절인 배추에 김칫소를 바르는 것도 얼핏 보면 쉬워 보이지만 나름의 요령이 있다. 바로 꺼내 먹을 김치에는 소를 많이 바르고, 오래 두고 먹을 것에는 바르는 둥 마는 둥 적게 발라야 맛이 제대로 밴다고 한다.
옆에서 잔심부름을 도우며 김장 울력을 지켜보고 있는데, 스님이 돌돌 만 김치를 손에 쥐고는 입을 벌려보라는 듯 눈짓을 주신다. 얼떨결에 입을 벌리고 새끼 새처럼 날름 김치를 받아먹는다. 역시 김장 때는 방금 만든 김치를 즉석에서 맛보는 재미를 빼놓을 수 없다. 아삭한 배추의 식감에 시원하고 매콤한 양념이 더해져 더할 나위 없는 맛이다. 삼킨 후에도 침이 계속 고인다.
이어서 남은 김칫소로 갓김치를 만들고, 남은 배추로는 고추씨김치를 만든다. 고추씨에는 항암 및 혈액 순환 개선, 체지방 감소에 좋은 성분이 들어있는데 고추씨기름을 내는 것 외에는 쓸 데가 별로 없어 안타까워하다가 고심 끝에 김치로 만들게 되었단다.
만드는 법은 아주 간단하다. 먼저 절인 배추를 김치통에 넣고, 고로쇠 간장과 각종 효소, 생강청, 연근 가루, 고추씨를 넣은 채수를 부어주면 끝이다. 바로 먹어도 된다고 하여 맛을 보니 깊은 채수에 알싸한 고추씨가 어우러진 시원한 물김치다.
겨울철 기력 보충과 감기 예방에 좋은 능이탕국
겨울에 스님들은 동안거에 든다. 혹독한 산사의 추위를 연료 삼아 백일 간 화두 정진에 힘쓰는 시간이다. 그 기간에는 기력을 보충하는 음식을 먹어주면 수행에 도움이 된다. 특히나 대중이 함께 수행하는 선방에서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면 뜨끈한 음식으로 몸에 열을 내주는 것이 좋다.
겨울이 되면 청암사에서는 능이탕국을 먹었다. 찬 바람이 불고 한두 명씩 기침이 시작되면 어른 스님이 아궁이에 장작을 지피고 가마솥을 올렸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능이탕국이 보양식으로 나왔다. 고작해야 1년에 한두 번 먹는 음식이었지만 우동 그릇으로 크게 한 그릇 국물까지 다 마시고 나면 아랫배부터 몸이 뜨뜻해졌다.
저녁 공양 시간. 푹 끓인 능이탕국과 배추말이전, 갓 만든 김치가 한 상에 모이니 겨울철 산사의 건강 밥상이다.

“능이탕국을 먹은 날이면 늘 어른 스님이 군불을 세게 지피고 뜨끈뜨끈하게 자라고 하셨죠.”
능이탕국 한 그릇으로 오던 감기를 싹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능이의 효능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는 엄하고 무섭기만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학인들을 생각하는 어른 스님의 마음이 능이탕국에 담겨 있었구나 싶어요.”
그 시절의 맛을 떠올리며 무쇠솥에 채수와 불린 능이, 채 썬 무, 콩나물, 청양고추 등을 넣고 푹 끓인다. 간은 소금 대신 고로쇠 간장으로 맞춘다.
“청암사에서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자연산 능이밭이 있었어요. 스님들이랑 능이를 따다가 손질해 말려서 은사스님께 선물하기도 했죠. 바로 딴 능이를 기름장에 찍어 먹으면 참 맛있어요. 그 시절엔 참기름이 귀해서 다락에 숨겨놓았다가 특별한 손님이 오셔야 꺼내곤 했는데, 어른 스님 몰래 살짝 꺼내서 찍어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능이탕국이 끓는 사이, 한쪽에서는 배추전을 만든다. 밭에서 딴 배추를 다듬을 때 거칠고 뻣뻣한 겉잎은 우거짓국 재료로 모아두고, 배추전을 만들 잎사귀도 따로 빼놓았다. 배추 위쪽의 두꺼운 부분을 부드럽게 두들겨 반죽이 잘 달라붙도록 앞뒤로 밀가루를 묻힌다. 도토리 가루와 연근 가루에 밀가루는 조금만 넣고 반죽을 만든 다음, 배춧잎에 반죽을 묻혀 들기름에 노릇노릇 부쳐준다. 소금에 절인 무채를 들기름에 볶아 배추전에 넣고 ‘돌돌돌돌’ 딴딴하게 말아주면 배추말이전 완성이다. 고소한 들기름에 부드러운 배추, 오독오독한 무채의 식감이 더해져 별미가 따로 없다.
저녁 공양 시간. 푹 끓인 능이탕국과 배추말이전, 갓 만든 김치가 한 상에 모이니 겨울철 산사의 건강 밥상이다.
“오랜만에 능이탕국을 먹으니 청암사에서 고생하던 시절이 생각나네요. 겨울이면 너무 춥고 절집 살림은 가난하고, 어른 스님들께 매일 혼나기만 하고…. 당시에는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돌이켜 보니 힘들었지만 참 재밌고 좋았던 시절이었어요.”
어떤 음식은 그 음식을 먹던 시절의 기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런 음식에는 분명 치유의 힘이 있다고 믿는다.
다음 날 아침, 스님들과 인사 나누며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도림 스님이 함께 만든 김장 김치를 보자기에 정성스레 싸주셨다.
“돈 주고도 못 사 먹는 절집 김치이니 무거워도 가지고 가세요.”
감사한 마음으로 김치를 들고 서울로 향하는 길, 마치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올겨울, 보덕사의 김치로 추운 겨울을 견디리라. 겨울을 이겨내는 맛이 여기 있다.
조혜영 에세이집 『똥글똥글하게 살고 싶어서』 저자. BBS 불교방송 및 BTN 불교TV 구성작가이자 KBS 라디오 드라마 작가, 월간 <불광>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대학에서 ‘문해력’ 강의를 하며 읽고 쓰는 즐거움을 세상과 나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