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꿈을 키우는 두 친구의 우정 템플스테이
라흐마노바 빅토리아 씨와 보르초바 폴리나 씨의 부안 내소사 템플스테이
‘흑해의 보석’이라 불리는 러시아 크림반도에서 온 라흐마노바 빅토리아(20)와
보르초바 폴리나(18), 이제 막 소녀의 티를 벗은 두 사람은 친구 사이다. 같은
크림반도 출신이라지만 각자의 고향은 약 2백 킬로미터 거리. 러시아에서는
서로의 존재도 몰랐던 사이라는데, 한국 유학을 계기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은 빅토리아와 세계적인
공연기획자가 꿈인 폴리나, 이 둘의 인생 첫 템플스테이는 고향집에 온 듯
마음 푹 놓고 쉴 수 있는 재충전의 시간이었다. 대자연과 한국의 정이 어우러진
내소사에서 두 사람이 보낸 1박 2일의 시간을 가만가만 따라가 본다.
한국이 맺어준 소중한 도반, 빅토리아와 폴리나
부안의 오랜 고찰 내소사는 소생蘇生의 도량이다. 백제 무왕 34년인 633년, 도량을 창건한 혜구두타 스님은 “이곳에 오는 모든 분들이 다 소생하여지이다.”라는 발원과 원력으로 산문을 열었다고 한다. 그 후로 지금까지 흐른 세월만 1,400여 년, 중창을 거듭해 온 내소사는 임진왜란 때 가람의 대부분이 소실되는 참화를 겪는다. 오늘날 내소사의 기초를 일군 분은 조선 인조 때의 고승 청민선사이다. 선사가 1633년에 중건한 대웅보전은 여전히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4백 년 가까운 세월의 향기를 전하는데, 꽃잎 하나하나 살아 움직이는 듯한 꽃살문과 신비로운 관음조가 붓을 입에 물고 장엄했다는 단청, 국내 최대 크기의 법당 안 후불벽화인 백의관음보살까지 대웅보전 하나만 보는 데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과연 볼거리도 많고 전하는 이야기도 풍성한 서해 제일의 관음기도 도량 내소사다.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을 따라 걷기만 했을 뿐인데 머리가 맑아진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한국어가 유창한 두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란 녹록하지 않았을 터, 긴장의 연속이던 마음의 빗장이 스르르 풀리는 느낌이다.
K-드라마의 팬이었다는 빅토리아는 한국에 온 지 3년 차, 중앙대학교에서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국어국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여느 대학생처럼 대외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는데, 요즘은 코리아타임스 글로벌 서포터즈로도 활동하고 있다고. 친구인 폴리나는 한국 생활 1년이 채 안 되었는데, 숭실대학교에서 언론홍보학을 공부하면서 밴드동아리인 ‘두메’에서도 활동 중이다. 게다가 학교 공부와 별도로 방송사 아카데미에서 공연기획 수업도 듣고 있는 열정적인 청춘이다. 러시아에서 같은 선생님에게 한국어를 배운 인연으로 폴리나가 유학 선배인 빅토리아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니 ‘한국’이 맺어준 소중한 도반이다.
불교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좋아한다는 두 사람은 무언가에 쫓기듯 바쁘기만 했던 서울에서의 생활을 잠시 잊고 자연의 품에서 쉬고 싶었단다. 생각을 멈추고 마음을 비우고 싶다는 이들의 바람에 내소사는 어떤 응답을 내어줄지.
자연과 함께 숨 쉬는 내소사의 시간
기대와 설렘으로 시작된 템플스테이의 첫 일정은 ‘곶감 만들기 체험’이었다. 감이 맛있기로 유명한 부안답게 지역 특색을 살린 프로그램이다. 지도법사인 진각 스님과 참가자들이 둘러앉아 큼직큼직 잘 여문 감의 껍질을 깎아내고, 말리기 쉽게 고리에 꿰어 처마 밑에 매다는 작업이 반복되었다. 간식으로 나온 감말랭이를 먹어가며,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처마 아래 주렁주렁 주홍빛 속살을 드러낸 감들이 늘어갔다. 단순한 노동처럼 보이지만 ‘잘 쉬려면 잘 멈춰야 한다’는 내소사 템플스테이의 철학 덕분에 ‘무념무상’ 빅토리아와 폴리나가 기대했던 ‘생각 비우기’가 곧장 실현된 셈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내소사의 긴 역사와 문화를 배우는 사찰 탐방이 이어졌다. 대웅보전을 비롯한 수백 년의 세월을 품은 옛 전각들을 둘러보고, 내소사에서 멀리 떨어진 관음전에도 올랐다. 경사가 가파른 길을 오르자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조고각하照顧脚下’ 발밑을 살피게 된다. 조금 숨이 찰 즈음이 되니 옛 사자암 터에 지어진 관음전이 점점 가까워졌다. 자비로운 미소로 반겨주시는 관세음보살님께 인사드리고 밖으로 나오니, 저 멀리 내소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전각 사이를 거닐 때는 볼 수 없었던 단정한 가람의 모습, 천년 세월 기도와 수행을 이어온 부처님 도량이다. “엄청 아름다워요.”라는 감탄사를 뒤로 하고, 자연 울창한 고향이 생각난다며 빅토리아와 폴리나는 잠시 말을 잊었다.
내소사 자연의 맛을 담은 사찰음식으로 저녁 공양을 하고 저녁 예불까지 마치자 내소사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적막하지만 쓸쓸하지 않은 사찰의 밤, 캠프파이어가 겨울의 낭만을 더했다. 천년고찰의 안전을 위해 만반의 대비를 갖추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차가운 밤기운을 장작불과 따끈한 뽕잎차로 녹이고 장작 속에서 잘 구워낸 군고구마를 나누어 먹으며 마음을 터놓은 대화의 시간이다. 이날 빅토리아는 사람들의 다양한 질문이 의미 있게 다가왔고, 러시아에서는 잘 먹지 않는 군고구마의 맛에 완전히 반했다고. 폴리나는 “우리가 여기 이렇게 있다는 것, 내 곁에 소중한 친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자.”는 스님의 말씀이 오랜 여운으로 남았다고 한다.
아름다운 청춘, 아름다운 인생
다음 날 새벽 4시 반, 예불이 시작됐다. 내소사 템플스테이에서는 필수적으로 새벽예불에 참석해야 한다. 평소라면 일어나지도 않을 시각이지만, 종교를 떠나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1교시 수업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은 빅토리아와 폴리나도 마찬가지다. 이례적으로 전날 밤 9시부터 꿀잠을 잤다는 두 사람은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새벽예불에 동참했다. 두 사람은 시원한 공기와 새소리, 하늘의 별들에서 다시 한번 고향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무수한 별들과 자연과 사람들을 말이다.
아침 공양 후에는 진각 스님의 지도로 내소사 템플스테이의 하이라이트인 요가와 명상을 배웠다. 진각 스님은 마음과 몸을 함께 닦고 싶은 바람으로 요가 수련을 시작해, 대학교에서 요가명상학을 공부한 요가 전문가이다. 욕심내지 말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따라 하는 것이 수업의 포인트. 살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힘들었던 몸과 마음이 새로 태어나는 순간이다.
빅토리아는 곶감 만들기도 너무 재미있었고, 차를 좋아해서 스님과의 차담도 즐거웠지만, 몸을 움직이는 요가는 꽤나 힘들었다고 한다. 반면 평소 춤을 좋아하는 폴리나는 요가와 명상까지도 매 순간이 행복했단다.
자신을 믿고 한국 유학을 응원해 준 가족들 생각이 많이 났다는 두 사람에게, 가족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지 물었다. 빅토리아는 “가족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항상 고맙습니다.”라고 답했고, 폴리나는 “제가 템플스테이에서 느꼈듯이 우리 가족들도 이렇게 편안하고 고요한 삶을 살기 바랍니다.”라고 답했다. 그들의 눈빛에서 깊은 사랑과 그리움이 묻어났다.
빅토리아와 폴리나는 풋풋해서 향기롭고 푸르다 못해 눈이 시린 청춘이다.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시기. 생각해 보면 부처님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한 나라의 왕자로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갈구하던 그때, 부처님은 진리를 찾아 일생일대의 모험을 했고 마침내 인류사에 빛나는 스승이 되었다.
두 사람 역시 사람들이 개척해 놓은 편안한 길이 아닌, 새로운 도전을 위해 한국에 온 모험가들이다. 장차 험한 자갈밭을 만날 수도 있고, 폭풍우 휘몰아치는 바다 위를 항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마음만 있다면 그 길의 끝에서 각자가 원하는 그 무언가를 반드시 성취하리라.
두려워하지 말고 청춘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를, 가끔 힘이 들면 내소사에서 만난 하늘과 별과 바람 그리고 사람들과 불보살님의 미소를 잠시 떠올리기를. 소생의 도량 내소사가 그대들을 응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