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의 계절, 풍요의 밥상
합천 해인사 보현암
"덥고 습한 늦여름의 공기 사이로 간간이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다시 새로운 계절을 맞을 시간이다. 기후 변화로 인해 언젠가부터 여름이 무척
길어지더니 가을이 오나 싶다가 금세 겨울이 되어 버린다. 가을이 귀해졌다. 짧은 틈새로 왔다 가는
가을을 붙잡아 가능하면 오래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다. 가을을 만끽하기에 산사만 한 곳이
또 있을까. 끈적이던 여름의 무게를 툴툴 털어내고 가을바람이 만들어내는
풍경 소리에 마음을 맡겨보자.
거기에 산사의 가을 밥상이 함께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운수행각의 계절
어쩌면 가을은 긴 날숨과도 같다. 한껏 들이마셨던 열기를 길게 내뱉는 시간, 그 깊은 호기(呼氣)에 하늘은 청명해지고 열매가 익어간다.
처서가 지났음에도 한낮엔 여전히 30도를 웃도는 더위 속에 가야산 해인사의 산내 암자인 보현암을 찾았다. 홍류동 계곡이 흐르는 깊은 산중, 보현암의 공기는 확실히 도시와는 달랐다. 에어컨이 없어도 어디선가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묵은 땀을 씻어준다. 코끝으로 전해지는 새로운 계절의 냄새. 절 마당에는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투명한 코스모스가 푸른 하늘색을 배경으로 하늘거린다. 스님들의 손길이 어디 하나 닿지 않은 곳이 없는 듯, 한눈에 봐도 정갈한 가람이다.
보현암은 1973년 혜춘 스님의 원력으로 세워진 비구니스님들의 수행처다. 혜춘 스님(1919~1998)은 대한불교조계종 전국비구니회의 초대 회장을 역임했던 비구니계의 큰 어른이다.
보현암의 도감 및 원주 소임을 맡은 삼행 스님이 하룻밤 머물 방사로 객을 안내한다. 템플스테이를 운영하는 사찰이 아니라서 방문객을 위한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스님들이 머무는 방에 깨끗한 이부자리까지 따로 챙겨주신 마음이 정성스럽다.
간단히 짐을 풀고 삼행 스님과 차담을 이어갔다.
사중에서는 오후 불식을 하기에 저녁 공양 대신 과일을 준비했노라며 잘 익은 수박과 포도를 내오신다. 일부러 장에 가서 좋은 걸로 사 오셨단다. 포도를 한 알 입에 넣으니 평소에 먹던 수입 포도와는 단맛의 차원이 다르다. 본격적으로 사찰 음식을 맛보기도 전에 벌써 미각이 깨어난다.
1989년 가을, 혜춘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보현암으로 출가한 삼행 스님은 이제 곧 절집에서의 서른여섯 번째 가을을 맞이할 참이다. 스님들에게 가을은 100일간의 하안거를 마치고 운수행각(雲水行脚)에 들어서는 계절이다. 『을사년 하안거 선사방함록』을 보면 이번 여름 보현암 선원에서는 삼행 스님을 포함해 15명의 대중스님이 정진에 들었다. 가야산의 정기가 느껴지는 보현암 선원은 습기가 없고 통풍이 잘되는 최적의 선방이다. 좌복 위에 굳건히 앉아 일념으로 화두를 들던 정진의 날들을 지나 자유로이 만행을 떠나는 시간. 굳이 멀리 길을 떠나지 않아도 안다. 흘러가는 구름과 계곡 물소리, 멀리서 날아오는 꽃향기를 따라 물아일체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마치 길을 떠난 듯 자유로워짐을.
채마밭을 풍성하게 만드는 가을의 열매들
다음 날 새벽 4시. 도량석과 함께 산사의 하루가 시작된다. 아직 동이 트기 전 새벽하늘엔 별이 가득하다. 도시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별빛이다. 이어지는 종성 소리가 두두물물(頭頭物物)을 깨운다.
보현암의 새벽예불에서는 혜춘 스님이 큰 스승으로 모셨던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능엄주’를 독송한다. 능엄주를 독송하면 수행의 온갖 장애들을 극복하는 힘이 생긴다고 한다. 무릎 꿇고 합장한 채 스님들의 독송에 온 마음을 기울이고 있노라니 마치 성스러운 음악처럼 아름답게 들려온다. 뜻은 알 수 없지만 신묘하고 참된 진리의 언어가 무한한 공간을 자비롭게 감싼다.
봉녕사 승가대학 사집반 보문 스님이 아침 공양 시간을 알리는 목탁을 친다. 여름방학 동안 보현암에 머물렀던 보문 스님은 가을 학기 개강과 함께 다시 강원으로 길을 떠날 예정이다.
아침 공양으로는 흰죽과 함께 간소한 나물 반찬, 요거트와 견과류, 빨간 토마토수프가 준비되었다. 절집에서 먹어본 음식 중에 토마토수프는 처음이다. 첨가물을 넣지 않고 끓인 토마토수프에서 달큰하면서도 새콤한 맛이 난다. 아침을 깨우는 신선한 맛이다.
오전 7시. 보현암 입구에 넓게 자리한 채마밭으로 스님들이 삼삼오오 모인다. 햇볕이 뜨거워지기 전에 채소들을 따기 위해서다. 보현암 채마밭에는 고추, 호박, 오이, 가지, 양배추, 가을무, 근대, 비트 등 온갖 채소가 자라고 있다. 김장을 담그기 위해 배추도 400포기나 심었다. 식재료 중에 두부와 콩나물만 사서 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나 가을이 되면 채소들을 수확하느라 대중이 바빠진다.
채마밭 한쪽 담벼락엔 하얀 박꽃과 함께 주렁주렁 박이 열렸다. 박을 따니 무게가 제법 나간다. 보현암에서는 추석 때 박속국을 끓여 먹는다고 한다. 씨와 껍질을 제거한 박을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들기름에 볶다가 채수를 넣고 끓여주는데, 자연산 송이를 넣기도 한다.
혜춘 스님이 자주 드시던 음식으로는 육근탕이 잘 알려져 있다. 토란, 우엉, 무, 당근, 감자, 연근 등 여섯 가지 뿌리채소를 넣고 끓인 탕으로 기력을 보충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음식이다. 육근탕을 만들려면 우엉이나 연근 등의 껍질을 벗겨야 하는데, 삼행 스님이 행자이던 시절 껍질을 한참 벗기고 나면 늘 손이 시커메지곤 했다고 한다.
“한번은 비구니회관에 계시던 혜춘 스님이 보현암에 오셨다가 행자들 손이 시커먼 걸 보고는 ‘손이 왜 그러느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육근탕을 준비하다가 그렇게 된 걸 아시고 ‘다음부턴 육근탕 하지 말아라. 내가 먹는 음식이 행자들을 괴롭히는구나’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나네요.”
잠을 자지 않고 수행하는 일주일간의 용맹정진 기간에는 조미음을 끓여 먹거나 갱엿을 고아 한 숟갈씩 먹었다고 한다.
요리든 수행이든 쉽고 빠른 지름길을 원하는 세상이지만 느리게 돌아가더라도 정석을 따라야 뭐든 제맛이 나는 법이다.
절집의 내림음식을 묵묵히 지켜온 전통
오늘 산사의 밥상 주재료는 감자다. 대중들의 점심 공양을 위해 삼행 스님이 강원도식 감자수제비를 만들 예정이다. 밀가루 없이 감자로만 만드는 수제비다. 스님은 이 음식을 월정사 육수암에 머물 때 원주스님이 해주던 것을 어깨너머로 배웠다고 한다.
15인분 기준으로 중간 크기의 감자 25개를 준비한다. 감자 껍질을 벗기고 강판에 갈아 갈변 방지를 위해 소금을 살짝 뿌려준다.
“감자를 믹서에 갈면 편하겠지만 입자가 콩가루처럼 너무 작아져서 안 돼요. 조금 힘들어도 강판에 갈아주어야 섬유질이 살아 있고 먹었을 때 식감이 쫄깃쫄깃해져요.” 요리든 수행이든 쉽고 빠른 지름길을 원하는 세상이지만 느리게 돌아가더라도 정석을 따라야 뭐든 제맛이 나는 법이다.
강판에 간 감자를 삼베 천에 싸서 물기를 빼주어야 하는데, 이 작업이 만만치 않다. 손으로 꽉 눌러 짜고도 아직 많이 남은 물기를 다 짜내기 위해선 생활의 지혜가 필요하다. 양동이에 물을 한가득 담아 삼베 천 위에 눌러놓는 방법이다. 양동이의 무게로 갈아놓은 감자의 물이 빠지면서 받쳐놓은 나무 도마 아래 대야로 녹말 물이 고이게 된다. 그렇게 3시간가량 놔두면 간 감자에서 빠진 녹말 물이 대야에 가라앉는다. 물은 버리고 가라앉은 녹말과 삼베 보자기 안에 있던 감자를 함께 반죽하면 절반의 작업이 끝난 셈이다.
공양 목탁을 치기 30분 전부터 옹심이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엄지 첫 마디만 한 크기로 반죽을 떼어내 손끝에 힘을 주어 동글납작한 모양을 만든다. 야무지게 꽉 눌러서 반죽이 잘 엉겨 붙도록 해야 물에 넣어도 풀어지지 않고 쫀득쫀득 찰기가 생긴다. 다시마와 표고버섯, 무, 엄나무 순을 넣고 끓인 채수에 옹심이와 애호박, 홍고추 등의 채소를 넣고 끓여주면 감자수제비가 완성된다. 여름 끝물의 참외로 직접 담근 참외장아찌와 산초장아찌까지 곁들이니 정갈하면서도 풍요로운 수행자의 가을 밥상으로 더할 나위 없다. 올해 3월 1일에 절에 들어온 행자님부터 노스님까지 모두를 만족시키는, 국수는 아니지만 웃음이 절로 나게 하는 ‘승소(僧笑)’임에 틀림없다.
“요즘엔 젊은 스님들의 입맛에 맞게 파스타, 피자, 떡볶이 등 절집 음식들도 다양해졌어요. 다만 절집 스타일로 밀가루 대신 얇게 썬 감자를 구워 피자 도우를 만들기도 하고, 단호박에 모짜렐라 치즈를 넣고 쪄 먹기도 하죠.”
사찰의 식문화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점 변해가고 있지만 보현암에서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 하나 있다. 바로 ‘원주일지’다. 혜춘 스님의 제사 및 자비도량참법 기도 등 사찰 행사 때 만든 음식 메뉴와 재료의 양, 레시피를 비롯해 그날 들어온 공양물 목록까지 꼼꼼하게 수기로 작성되어 있다. 공양물 목록을 적은 다음에는 누군가로부터 은혜를 입었을 때 하는 보시주은진언(布施主恩眞言) ‘옴 아리야 승하 사바하’가 적혀 있다. 작은 공양물 하나까지도 감사함을 잊지 않는 마음이 노트 곳곳에 묻어난다.
2022년 가을의 원주일지에 따르면 10월 30일(음력 10월 6일)은 김장을 한 날이었다. 절집 김장은 보통 동안거 시작 전에 담그니 올해 김장도 얼마 남지 않았다. 김장용으로 배추 400포기도 심어놓았고, 가을무에 고추 농사도 잘되었으니 그 맛은 맛보지 않아도 이미 알 것 같다.
보현암에는 ‘마음 심(心)’ 자 모양의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연꽃이 핀 연못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심(心)’ 한 글자가 마치 화두처럼 가슴으로 들어온다. “해가 뜰 때 티베트의 하늘은 보라색으로 물든다는데, 보현암에서 바라본 일출의 하늘은 잘 익은 홍시색이에요. 날이 추워질수록 붉은색이 더 짙어지죠.” 그날 새벽, 흐린 날씨 탓에 아쉽게도 홍시색 하늘은 볼 수 없었지만, 올가을 잘 익은 홍시를 볼 때면 보현암의 새벽하늘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사찰의 식문화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점 변해가고 있지만 보현암에서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 하나 있다. 바로 ‘원주일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