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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에서 날아온
독립유공자의 후손들
보은 속리산 법주사

글. 김수정

사진. 하지권

1905년 봄,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제물포항을 출발했다. “해외에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인생 일대의 모험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목적지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 메리다 항구.
신문의 문구들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땡볕 아래 펼쳐진 에네켄 농장과 악랄한 농장주, 새벽부터
해 질 녘까지 이어지는 고된 노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강인했다. 가난한 삶에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 고국으로 송금했고, 각종 차별을 극복하고 당당히 뿌리를 내렸다. 멕시코
한인 이주 120주년을 맞은 2025년 여름, 선조들을 향한 존경의 마음을 간직해온 13명의 후손이
선조들의 숨결을 따라 한국 땅을 밟고 법주사에서 한국의 멋과 정, 부처님의 법을 온몸으로 느꼈다.

부처님 품을 찾은 멕시코의 청년들
‘부처님의 법法이 머무는[住] 절’ 법주사는 ‘세속을 떠난[俗離] 산’인 속리산에 자리한 충북 최고의 대찰이다. 많은 이들이 불보살에게 의지하며 삶의 희망을 다져온 미륵신앙의 성지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기도 하다.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의 초청으로 모국을 방문한 멕시코의 청년들이 이곳 법주사에 도착한 것은 3시를 넘긴 늦은 오후였다.
이역만리 멕시코에서 날아온 13명의 청년이 한국을 찾은 이유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이들의 방문은 6월 9일부터 15일까지 진행된 ‘2025 주멕시코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 팸투어’의 일환이었다. 광복 80주년과 멕시코 한인 이주 120주년을 기념해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이 기획하고, 외교부, 주멕시코 대한민국 대사관, 한국관광공사 멕시코시티지사의 도움으로 이뤄졌다.
법주사 템플스테이 지도법사 덕원 스님이 건넨 매실차를 마시며 감탄하는 모습에서 처음 마주한 고국의 맛에 놀라워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멕시코에 정착한 한인들의 4대, 5대 후손에 해당하니 여행지에서 만났던 한인들과는 해외 거주의 출발점이 다름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한옥 숙소인 정재당에 짐을 푼 참가자들은 최재승 템플스테이 팀장에게 사찰 예절과 삼배하는 법을 배우고, 덕원 스님의 안내로 법주사 탐방에 나섰다. 금강문을 지나 높이 33미터 동양 최대의 미륵불상 앞에 서니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 커진다. 국내 유일의 5층 목탑인 ‘팔상전’의 장엄하고도 고색창연한 모습에 400년 이상 된 건물이라는 스님의 설명이 더해지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부까지 꼼꼼히 돌아보고서야 신라 장인들이 조성한 독특한 양식의 국보 ‘쌍사자석등’을 만났다. 그 사이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쉴 새 없이 휴대폰 카메라의 셔터가 터졌다. 대부분 한국 방문이 처음인 만큼 가족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으리라.
마지막으로 대웅보전에 들어서니 또 한 번 감탄사가 터진다. 보물로 지정된 삼존대불은 장중하고, 주변을 장엄한 조각과 단청들은 신비롭다.
부처님께 올리는 삼배 실습의 시간, 멕시코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는 낯설기만 한 절이 차츰 자연스러워진다. 템플스테이복을 입고 미소를 띠며 합장한 얼굴들을 찬찬히 다시 살피니 ‘아!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구나! 참으로 오랜 기다림 끝에 먼 길을 왔구나!’ 왠지 모를 감동이 밀려온다.
공양간에서 정성이 듬뿍 담긴 사찰음식으로 몸과 마음을 채우고 나니 법고 소리가 저녁예불의 시작을 알렸다. 거대한 북을 번갈아 치는 스님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청년들, 웅장한 북소리가 온몸에 스며든다. 고국을 떠나기 전, 선조들도 수없이 들었을 소리다.
경건한 자세로 저녁예불을 마치고 ‘단청 채색 체험’이 진행되었다. 각자가 원하는 색으로 조심조심 붓을 쥔 손을 움직이니 자연스레 마음이 하나로 모인다. 문양이 같아도 결과물은 각양각색, 각자의 개성이 담긴 13개의 작품을 탄생시키며 첫날 일정이 모두 끝났다.
절을 배우며 다가선 마음
다음 날 새벽 4시 반, 법주사 새벽예불이 시작되었다. 전날의 저녁예불 때보다 한층 익숙하게 절을 하는 참가자들. 예불을 마치니 곧바로 ‘108염주 만들기’가 이어졌다. 삼배도 힘들어하던 청년들이 108배를 하면서 한 알 한 알 염주를 꿰어나간다. 누군가는 무념무상으로, 누군가는 가족들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완성한 108염주를 한국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날 때까지 소중하게 손목에 감고 다녔다.
대웅보전을 나서자 두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아침 공양으로 든든히 배를 채우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쌩쌩해진다. 과연 청춘이다. 자율 참가인 수정봉 등반에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지원했다. 수정봉은 높이 565미터 정도의 낮은 봉우리지만 법주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속리산 8봉 가운데 하나이다. 제법 가파른 산행길, 서로를 잡아주고 밀어주며 정상 부근의 거북바위에 오른다. 이틀 전 멕시코에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친분이 없었다는데, 어느새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가 되었다.
산행을 마친 13명의 청년에게 덕원 스님이 시원한 차를 내어주며, 각자가 꿴 108염주를 한국의 전통 매듭으로 마무리해 작은 주머니에 담아서 건넸다. 지혜를 일깨우는 작은 종과 텀블러도 함께 선물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간단한 명상법을 배우며 법주사 템플스테이를 마쳤다.
기억을 꿰어, 마음을 전하다
예부터 ‘효’를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온 한국이지만 5대조, 4대조, 3대조 할아버지, 할머니를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몇 대 위의 조상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대를 이어 이야기를 전하는 집안은 많지 않으리라. 그러나 멕시코의 4대, 5대의 후손들은 1909년 ‘대한인국민회 멕시코 메리다지방회’를 창건하고 한인의 자치와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선조들의 삶을 여전히 기억하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참여자 마리벨 디아스 구스만 사발라(Maribel Diaz Guzman Zavala) 씨는 “천 년이 넘는 세월, 전통을 지켜온 법주사에 감명받았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독립유공자 이영순 선생의 후손인 그는 정성스레 만든 108염주를 바라보며 “한 배 절을 하고 염주알을 하나씩 손으로 꿰어서 완성한 기분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기쁘면서도 편안했다”며, “이 염주는 엄마께 꼭 선물로 드리고 싶다”고 웃으며 말했다.
또 다른 참여자인 멕시코시티 한인후손회의 홍보 담당인 크리스티나 손이 구스만 콩(Cristina Son Yi Guzmán Cong) 씨는 독립유공자 고희민 선생과 독립유공자 공덕윤 선생의 후손이다. “선조들이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 했던 ‘독립된 조국’에서 천년고찰이 주는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어 행복했다”며, “완성한 염주는 할아버지께 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고즈넉함과 평화로움이야말로, 선조들이 꿈꿨던 조국의 모습일 것이라 생각하니 울컥했다”고 마음을 전했다.
독립유공자 고희민 선생의 후손인 파드메 앙헬리케 에스트라다 바산(Padme Angelique Estrada Bazán) 씨는 자신의 고조할머니를 떠올렸다. 그는 제주도민이었던 고조할머니의 이야기를 지금도 가족들과 나눈다. 그리고 김치, 국수, 파전, 비빔밥은 외할머니가 종종 해주시던 음식들이었다. 법주사에서 공양을 하니 “마치 집밥을 먹은 것 같다”며 미소 지었다.
“사찰을 걸으며, 이 길을 걸었을 선조들이 떠올랐다”는 독립유공자 이순여 선생의 후손 이장유리(Yuri Chang Lee) 씨는 가톨릭 국가 멕시코에서 보기 드문 불자다. 1967년 한국과 멕시코 제1호 교환학생이던 아버님이 이순여 선생의 손녀인 어머님과 결혼해 멕시코에 정착했다. 아버님이 자주 한국의 불교에 대해 말씀했기에 템플스테이에 대한 기대가 컸다. 가족과 함께 다니는 멕시코시티의 사찰은 규모가 작은데 법주사의 웅장한 규모와 고요한 분위기에 감화되고 불교의 조화와 상생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가면 자신의 경험을 아들에게도 전해주고 싶다며 웃음꽃을 피웠다.
한국에서의 일정이 모두 종료된 후, 멕시코로 돌아간 청년들은 한 통의 메일에 이렇게 소감을 전해왔다.
“조상의 문화를 직접 접하고 불교를 새롭게 발견한 것은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 중 하나였습니다. 이 소중한 인연이 끊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두물물頭頭物物 화화초초花花草草. 모든 것이 법을 설한다”고 했다. 세상 만물이 불보살의 화현이니 태평양 건너 멕시코 땅에서도 마음만 열면 언제든 부처님을 만날 수 있으리라. 법주사 불보살님의 가호지력이 이들의 앞날을 비춰주기를.

김수정 대학과 대학원에서 불교학을 전공했다. (사)한국방송작가협회에 적을 둔 불교계 방송작가이다. 5살 때 할머니, 엄마와 다니던 작은 사찰의 돌부처님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