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는 마음에 딱, 앉아라
문경 한산사 용성선원장 월암 스님
“반전이 있는 절이네요, 한산사는.”
그렇게 말씀드리자, 월암 스님이 웃으신다.
처음 도착해서 한가로운 산에 둘러싸인 절의 전경을 보았을 때는 소박하고 아담하구나,
하는 감상이 먼저 떠올랐다.
본존불을 모신 법당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휴정선원’이라는 현판을 단 간소한 선방이 법당을 겸해 있다.
“창건한 지가 얼마 안 되어서 아무 꼬임이 없어요.
그냥 자연 그대로 소박하게.”
라는 스님의 말씀대로, 겉치레도 장식도 없었다.
그러나 찬찬히 둘러볼수록 절은 의외의 면모를 보였다.
용성선원으로 올라가는 길의 한쪽에는
보석처럼 예쁜 산신각이 있다.
북경중앙미술대학에서 돈황벽화를 연구한
동덕여대 교수 서용 작가의 독특한 탱화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전각마다 걸려있는 현판도 범상치 않다.
유명한 서예가 이이우 작가의 글씨다.
서용 작가는 스님이 중국에서 유학할 때의 인연으로,
이이우 작가는 참선 제자의 인연으로 불사를 도왔다.
카페같이 세련된 공양간에서는 맛깔스러운 밥이 차려진다.
“공양주 보살님도 훌륭하시네요.
어떻게 그런 분과 인연이 닿으셨어요?”
하자 스님은 다시 한번 웃으신다.
한산사는 백두대간에서 가장 가까운 절로,
찾아가려면 큰맘 먹어야 하는 깊은 산골에 있다.
예전에 화전민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그런데도 매달 50명 가까운 사람들이 참선을 하러 온다.
부산에서 네 시간, 서울에서 세 시간씩 달려온다.
“오지 말라고, 가까운 데로 가서 참선하라는데,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씩은 여기 와야 된다고.”
고집하는 신도분들은 모두 월암 스님의 한 말씀을 바라고 오는 인연이다.
그 인연들로, 한가한 한산사는 늘 가득 차 있다.
이른출가, 투병, 그리고 물을 건너 도인을 만나다
중학교 2학년 때 출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약간 짓궂은 질문인데요,
사회에서 생활하다가 연애도 해보고 삶이 어떤 건지도 맛보고 나서 좀 늦게
출가했으면 좋았겠다,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으세요?
그런 생각 더러 하죠. 나이가 좀 들고 난 뒤에 돌아보니 그래도 세상을 좀 알고 출발을 했다면 수행이나 공부에 있어서 시행착오를 덜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찍 출가해서 바로 수행에 들어가는 것도 큰 장점이지만 세상의 물정을 너무 모르고 출가한 탓에 세상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경우도 많이 봤거든요.
스님은 글이 참 좋으시잖아요. 어린 시절에 문학 소년이었다고 들었어요.
그러면 작가가 된다든가, 다른 직업을 한번 가져보고 싶으셨을 듯도
한데, 그런 후회는 안 하세요?
중·고등학교 때 백일장에 나가면 상을 많이 타고 그랬어요. 소질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랬는데 절집으로 들어와서 수행하고, 어르신들 시봉하고, 또 공부하고, 청년기를 바쁘게 지내다 보니까 그런 자질을 살릴 기회가 별로 없었죠. 요즘 나이 먹어서 책을 쓰게 되었는데, 좀 도움이 돼요. 다른 사람들은 글쓰기를 참 어렵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나는 글을 잘 쓰지는 못하지만, 그냥 쉽게 풀어나가게 돼요.
작가가 아니라 스님이 되어주셔서 너무 다행이에요.
덕분에 저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좀 더 편안하고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네요.
새삼
고맙습니다.
스님은 일찍 출가하신 것뿐 아니라 치열하게 수행하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 때문에 큰 병도 앓으셨죠.
체온이 40 몇 도 올라가고 거의 죽을 고비를 넘겼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영양실조가 바탕이 되고, 과로와 여러 가지가 겹쳐 열병이 났던 거지. 의사도
나중에는 그냥 "안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퇴원을 했는데, 절에서도 "아이고, 젊은 중이 하나 죽는구나!" 하며 뒷방에 그냥 밀어버릴 정도였어요.
결국 어떻게 어떻게 회복은 했는데, 고된 시절이었죠.
그 이후 군에 다녀오고 난 뒤에는 안면마비가 왔어요. 그것 때문에 정신적 타격을 입었죠. 회복한
후에 포교 활동을 하다가 생각해 보니 몸도 마비에서 온전하지 않고, 도를 닦아 견성오도(見性悟道) 하려고 출가했는데... 중국에 가면 틀림없이 숨은
도인과 마비 증세에 용한 의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해서 그냥 다 접어버리고 중국으로 건너간 거야. 그것이 하나의 큰 전환이 되었죠.
중국 가셨을 때 그래서 도인을 만나셨나요?
내가 갔을 때가 문화혁명 이후로 불교가 굉장히 쇠퇴한, 끝 무렵이었어요. 민국 시대 끝자락의 가장 큰 스님이 허운 선사인데, 그 제자들이 그때 60, 70,
80대였어요. 공산 정치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전면에 나서서 활동을 못 하신 분도 있지만, 그분들의 영향력이 남아 있었습니다. 중국 곳곳에 그래도 선방이 열려
있고 강원이 열려 있는 때에 건너간 거죠. 스님네들이 활발발한 기상은 없다 하더라도 숨어서 조용히 불교의 선맥을 이어가고 있었어요. 노스님들을 만나서 그분들의
꾸밈 없이 순수한 수행의 태도, 또 삶의 태도에 굉장히 감명을 받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할 수 있죠.
허운 선사 제자들이 내건 슬로건이 ‘인간 불교’입니다. ‘사람이 부처다’ 그 말이거든요. 조사선 불교의 핵심 사상인데, 인간 불교를 조용히 실천해 가시는
그분들의 모습에서 ‘진짜 도인의 모습이 저런 것이로구나.’ 하며 많이 동화됐죠. 지금 제가 인불(人佛) 사상을 주장하는 이유는 거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선불교 자체가 ‘마음이 부처요, 사람이 부처’라는 것이 종지이기도 하고요.
중국을 주유하시면서 수행자들을 만났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셨나 봐요.
지금 내 인생에 그 영향이 지대하죠. 지금으로부터 35년, 40년 전의 중국은 어려웠어요. 제가 1956년생인데 참 어려운 시절을 다 겪었잖아요. 그리고 80년대 말, 90년대 초 우리나라가 좀 살만해지니까 중국으로 건너갔잖아요. 건너가니까 우리나라 50, 60년대가 또 있는 거예요. 그 어려운 시절을 내 인생에서 두 번 겪었어. 그러니까 처음에는 기가 차더라고요. 그걸 온몸으로 다 부딪쳤잖아요. 도 닦는 건 머리로 하는 게 아니고 온몸으로 부딪치는 거거든. 지금은 머리로 다 하려고 그러는데, 그게 아니야. 도는 몸으로 부딪치는 거야. 몸으로 닦는 거란 말이에요. 그거 하나는 제가 제대로 터득한 거죠.
스님이 이끄시는 수행공동체 이름이 <불이마을>이잖아요.
그래서 이름을 이렇게 지으셨나보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삶과 수행,
견성성불과 요익중생, 지혜와 자비, 스님과 재가자, 이런 식으로
우리가 머릿속에서 계속 분리하는 것들이
사실은 ‘둘이 아니다’라는 얘기를 한결같이
말씀해 주고 계시니까요.
그런데 지금의 사람들은 계속 선택을 강요받고, 편을 가르고 지금 당장 어느 편인지 정하라면서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식으로
싸우고 있거든요.
이게 너무 고통스러운데, 지금 당장 부처님 법을 우리 삶에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불교의 가르침 자체가 불이중도不二中道죠. 불교의 핵심이에요. 이 현대사회가 물질문명의 지배를 받으면서 심각하게 이원화되어 버렸어요. 이걸 도식적으로 일원화하기는 쉽지 않아요.
좌우의 대립을 생각해 보면, 우리 몸에 비유하면 오른손이 옳으냐 왼손이 옳으냐 이 말이거든. 이건 손의 차원에서는 영원히 대립할 수밖에 없어요. ‘차원의 승화’에서만 가능하거든요. ‘몸통’이라는 차원으로 승화시켜 버리면 좌도 필요하고 우도 필요하죠. 몸의 차원에서 보면 오른손은 오른손의 할 일이 있고 왼손은 왼손의 할 일이 있잖아요. 한쪽이 다른 쪽을 없애는 게 아니라 좌도 살고 우도 사는 살림의 통합이 되어야 해. 차원을 승화시키는 수밖에 없어요. 부처님의 불이중도 사상이 이원화된 시대에 가장 좋은 약이 될 수 있어요.
우리가 일상에서 참선을 해야 하는 이유가 좀 더 높은 차원을 볼 수 있게 해주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일까요?
선의 가장 핵심 요소가 뭐냐면 직관과 통찰이거든요. 직관이 뭐예요? 정확하게 본다는 것, 바로 본다는 말이거든. 가식 없이 진실을 진실로 보고,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거거든.
통찰은 뭐예요? 전체로 본다는 말이야. 부분만 보는 게 아니라, 부분을 전체로, 하나로 볼 수 있는 게 통찰이란 말이에요. 그게 선의 효용이라. 정확하게 보면 문제 해결이 되잖아요.
보통 참선이나 명상의 장점을 말할 때 ‘평화로워진다’, ‘고요해진다’고만 하지
실제로 삶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대한 얘기는 거의 안
하거든요.
그런데 스님이 말씀하신 대로 직관과 통찰을 갖게 되면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얘기잖아요.
지금의 심각한 이원론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선과
명상이네요.
당연하지. 명상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그릇 속에 물이 가득 차 있는데 바람이 불어 물결이 일어난단 말이야. 그러니까 흙탕물 찌꺼기가 일어나겠죠. 그걸 가라앉히면 물이 맑아지겠죠. 그걸 명상이라고 생각해.
몸이라는 그릇, 마음이라는 물, 경계라고 하는 바람이 있어서 일어난 번뇌, 근심, 걱정, 스트레스라는 흙탕물을 가라앉히는 것을 명상이라고 해버리면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린단 말이야. 경계에 부딪쳤을 때 경계 아닌 도리로 깨우쳐야 올바른 명상이 되죠.
부처님은 “네 몸이라는 것은 인연으로 잠시 된 몸이다. 그릇이라는 것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라는 것도 한 생각 일어났다가 한 생각 사라지는 생멸의 마음이기 때문에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물도 원래 있는 게 아니다. 물이 없는데 경계에 부딪쳐 흔들릴 것이 뭐가 있으며, 찌꺼기 일어날 것이 뭐가 있느냐.”고 말씀하셨어요.
오온이 텅 비어 있다는 이 사실을 직시하는 게 올바른 명상이란 말이야. 생각이 본래 실체가 없다는 도리를 깨우쳐라, 그러니까 참선을 해라, 명상을 해라, 이거거든요.
예전에 하신 법문 중에서 마음이 두 가지라고 하신 게 기억나요.
하나는 작용하는 마음이고 또 하나가 금강석 같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라
하셨는데요,
사람들이 마음이 아프다 할 때의 그 마음이 작용하는 마음일 텐데,
요즘 사람들은 마음의 고통을 많이 토로하거든요.
이 작용하는 마음을
어떻게 제어하고 다스려야 할까요?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마음을 본래심(本來心), 작용하는 마음을 반연심(攀緣心)이라고 해요. 반연심은 본래심에서 일어나요. 바다에 비유하면 물 자체가 본래심이에요. 그리고 끊임없이 치는 파도가 반연심이죠. 본래심은 천 가지 생각을 해도 불생불멸이야. 천 파도 만 파도가 치더라도 바탕은 물이란 말이에요.
파도 자체가 물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리면 파도에 흔들릴 필요가 없어요. 바다는 물과 파도를 동시에 이야기하는 거지. 파도만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물만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란 말이에요.
잠시 일어났다 사라지는 마음에 속으면 안 돼요. 반연심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심의 바탕 위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소멸되는 허깨비의 모습이란 말이에요. 물거품이라고. 그 거품이 다라고 생각하니까 괴로움에, 즐거움에, 슬픔에 빠져버린단 말이야.
그런데 바탕인 본래심에 내가 딱 앉아 있으면, 그게 바로 좌선이에요. 좌선의 좌가 본래심에 앉는 그게 좌란 말이야. 좌복에 앉는 게 좌가 아니고. 거기 들어앉아 있으면 괴로움이 오더라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힘이 생겨요. 그 자리에 앉아버리면 객관 경계가 꿈의 경계가 되어버린단 말이야. 꿈속에서는 그렇게 즐겁고 괴롭더라도 깨고 나면 그냥 아무 일 없었잖아요. 본래심에 앉는다는 것이 꿈 깬 자리로 앉는다 그 말이거든.
선에서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말을 많이 해요. 견성이라는 건 일체 상(相)을 보되 상이 텅 비어 있는 그 자리를 보는 거예요. 견성은 명사가 아니고 동사예요. 매번 견성이 이루어져야 하는 거야. 지금 삶 속에서, 끊임없이 상 속에 살지만 상의 공한 자리를 터득하고 있으면 그게 견성이죠.
스님이 “금강석 같은 마음에 앉아 있는 것이 좌선이다.” 하셨잖아요.
그 자리에 앉아서 보면 작용하는 마음이라는 건 실체가 없고
계속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뿐이라는 걸 알게 되잖아요.
그러면 그 움직이지 않는 마음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바로 견성을 하고 있는 상태겠네요.
그렇죠. 견성하고 있는 상태지. 견성이 삶 속에서 이어져야 한다는 말이야. 어떤 경지에서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삶 속에서 견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