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나의 관세음보살입니다
조셉 벤지반니 가족의 여수 향일암 템플스테이
"절이 좋아 한국에 정착한 캐나다인 조셉 벤지반니 씨.
한때 출가를 꿈꿨던 그는
아름다운 한국의 발레리나를 만나 인생 최고의 보물을 얻었다.
아내와 자신을 닮은 세 명의 아이들.
때때로 예기치 못한 문제가 화두처럼 던지며 ‘아버지’의 무게를 자각하게 하지만,
머리를 맞대고 함께 문제를 풀면서 행복을 쌓아온 인생의 도반들이다.
주말마다 절을 찾는 조셉 씨는 33관음성지 순례를 회향한 베테랑 순례자.
어느덧 사춘기에 접어든 딸 휘나와 아들 첼로와 함께 떠난
여수 향일암 템플스테이는
세 사람에게 또 하나의 행복을 더해주었다."
금빛 해를 품은 절, 여수 향일암
일출을 보기 위해 새해 첫날에만 3만 명, 연간 100만 명 이상이 찾는다는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향일암. 한국의 4대 관음기도성지로 손꼽히는 향일암은 여수 돌산읍 금오산에 자리한다. ‘쇠 금(金)’에 ‘자라 또는 거북이 오(鰲)’를 쓰는 일명 ‘금거북이 산’이다. 아침 햇빛을 받으면 황금빛으로 빛난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데, ‘금거북이 산’을 부처님 성지로 거듭나게 한 향일암의 역사는 644년 원효 대사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고 ‘원통암’을 창건한 데에서 비롯된다.
이후 금오암, 영구암, 책육암, 거북절 등으로도 불렸다. ‘해를 향한 암자’라는 의미의 ‘향일암(向日庵)’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명칭이다. 해수관세음보살상 아래로 원효 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는 좌선대가 있고, 경전을 던지자 바위가 되었다는 ‘경전바위’는 대웅전 뒤편에 우뚝 솟아 있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과 용왕대신, 남순동자를 모신 천수관음전 앞쪽 바닷속에는 용궁이 있다고 한다. 풍수지리적으로도 거북이가 경전을 등에 지고 용궁을 향해 들어가는 지형이라니, 도량 곳곳에 거북이 조각이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은 모습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향일암의 오르막길은 금오산 거북이의 목에 해당하는 주차장에서 시작된다. 경사진 길을 20분쯤 올라가면 일주문이 보이고, 계단을 오르면 입을 막고, 귀를 막고, 눈을 막은 귀여운 돌부처님 세 분이 멀리서 찾아온 이들을 반긴다. 그리고 곧 사찰에서 보기 드문 등용문을 만나는데, ‘이 문을 통과하는 모든 이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입신출세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등용문을 지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힐 때쯤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와 땀을 식힐 수 있는 카페가 나온다. 바다를 보며 한숨 돌리고 나니 템플스테이 집합 시간이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템플스테이 실무자의 씩씩한 인사말로 향일암 템플스테이가 시작되었다. 숙소에 짐을 놓고 템플스테이 복장으로 갈아입은 참가자들. 노란색 조끼에도 향일암의 마스코트 거북이가 수놓아져 있다.
향일암에는 7개의 바위틈을 모두 통과하면 칠성의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위로 이루어진 독특한 해탈문이다. 좁은 해탈문을 지나 계단을 좀 더 오르면 향일암의 중심인 대웅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부처님께 먼저 인사를 드려야 하지만, 대웅전 앞에 펼쳐진 망망대해에 시선을 빼앗기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늘과 바다가 만들어낸 끝 모를 수평선, 눈부시게 반짝이는 윤슬에 탄성이 흘러나온다. 사방이 인생 사진을 남길 ‘포토존’이니, 카메라를 든 조셉 씨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아빠와 남매의 인생 첫 템플스테이
엄마와 10살 막내는 남겨두고 아빠와 남매만이 떠나온 여행. 조셉 씨는 주말마다 집 근처의 개심사, 천장사, 수덕사를 필두로 전국의 사찰을 찾는다. 아이들도 이런 아빠를 곧잘 따라나서는데 절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조셉 씨의 한국 이름은 길도(吉道), 한마음선원 대행 선사께 오계와 함께 받은 법명이다. 캐나다에서 미술학을 전공한 조셉 씨는 영어 선생님이 되고 싶어 전문적인 영어교육자 자격 과정을 이수하고 2005년 한국으로 왔다. 그해 지인들과 찾은 불국사에서 받은 감명은 지금도 가슴을 뛰게 하고, 집에 온 듯 편안했던 느낌은 그를 서서히 불자의 길로 이끌었다. 결혼 후 캐나다로 돌아갔던 7년을 빼고 한국에서 거주한 지는 13년 정도, 지금은 서산에서 아이들에게 영어와 미술을 가르치면서 대학 때부터 공부한 수준급의 사진과 글로 한국의 불교를 세계에 알리고 있다.
16살인 큰딸 벤지반니 휘나는 애니메이션과 심리학을 좋아하고 미술에 재능이 있는 소녀다. 발레리나인 엄마가 존경하는 천재 안무가 ‘피나 바우쉬’에서 ‘피나’를 따서, 한국 이름으로는 ‘밝을 휘(煇)’, ‘아름다울 나(羅)’를 쓰는 ‘휘나’가 되었다. 13살인 둘째 아들 첼로는 컴퓨터와 과학에 관심이 많다. 이탈리아어로 ‘시냇물’을 뜻하는 루시엘로(ruscèllo)에서 ‘첼로’가 되었다는데, 한국 이름은 ‘준’이다.
조셉 씨는 이번 향일암 방문이 세 번째인데, 2007년 추석 때 여수에 사는 친구의 아버지가 처음 데려와 주었고, 얼마 전에는 33관음성지 순례를 완성하기 위해 혼자 향일암을 찾았다. 그리고 아이들도 향일암의 절경과 자연, 평화로움을 온몸으로 느끼고 스님과의 대화에서 삶의 방향을 찾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템플스테이에 참여했다.
맛있게 공양을 마친 후 저녁예불과 자율적인 108배를 끝내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이던 향일암이 고요해지는 시간이다. 템플스테이 첫날의 마지막 일정은 ‘내 방에서 바라보는 향일암 별밤 바라보기’. 방에 들어가 불을 끄고 누우면 수만 개의 별들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는데, 애석하게도 이날은 별을 볼 수 없었다. 태양만큼이나 밝고 둥근 보름달 때문이다.
해가 지고 나니 햇빛에 가려져 있던 달이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바다 위로 길게 드리워지는 달빛, 그 위를 배 한 척이 유유히 지나간다. 온갖 걱정과 번민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다들 숙소로 돌아가고 스님의 축원 소리만이 도량을 울리는데, 조셉 씨의 카메라는 잠시도 쉬지 않았다. 향일암의 아름다운 모습, 그 찰나의 순간을 담아내려는 노력이 스님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마침내 마주한 일출, 내 안의 부처님
다음 날 새벽 4시 50분, 달이 저물자 모습을 드러낸 별빛을 받으며 새벽예불이 시작됐다. 평소에는 아침 8시에 일어나는 휘나와 첼로도 졸린 눈을 비비고 참석했다. “오직 광명한 지혜뿐이라, 산과 물 사이에는 지혜가 쓸 데 없다.”는 경허 스님의 말씀을 좋아하는 조셉 씨에게는 내 안의 부처님을 만나는 시간이었으리라.
새벽예불이 끝나니 고대했던 향일암의 일출을 볼 수 있었다. 원효 대사를 가장 존경한다는 조셉 씨에게 사중의 허가로 특별히 좌선대에 앉을 기회가 주어졌다. 1,400여 년 전 원효 대사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한 순간이 1박 2일 동안 가장 인상 깊었다는 조셉 씨. 아침 공양 후에는 스님께서 내어주시는 차를 마시며 잠시 담소를 나누고, 금오산을 산책하며 곳곳에 산재한 거북이 등껍질 같은 무늬의 바위들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휘나와 첼로는 금오산 정상에 올랐을 때 보았던 아름답고 시원한 경치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했다.
누구나 소원 하나는 반드시 이룬다는 향일암은 모든 전각이 바다를 향하고 있다. 기도를 하고 있으면 관세음보살이 어루만지는 듯 따스한 햇살이 등을 감싼다. 세상살이에 지쳐 있던 마음이 녹아내리고, 밝은 태양의 에너지가 몸 안으로 스며든다.
템플스테이를 마치고 나니 몸과 마음이 생기를 되찾고 기분이 한껏 산뜻해졌다는 휘나와 첼로, 모든 순간이 환희로웠고 다음번엔 아내와 막내까지 온 가족이 함께 오고 싶다는 조셉 씨. 향일암에 머물며 잠시나마 기도한 공덕으로 모두 평안하고 각자의 꿈을 이루기를.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