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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무엇을 지키며 오늘을 살아가는가?

합천 해인사 — 백련암, 희랑대, 국일암

글. 황유원

사진. 최항영

배낭 하나 메고 이곳저곳 떠돌던 시절에,
인도의 보드가야도 가보고 가야도 가봤지만 한국의 가야산은 초행길이었다.
들뜬 마음에 어두운 새벽 네 시부터 눈을 떠 창문을 여니 세상은 가을비로 젖어 있었다.
요 며칠 사이에 계속 내리던 비와 하등 다를 것 없는 비였으나, 비를 바라보는 자의 마음이 바뀌었기
때문이었을까. 밤새 세상의 모든 번뇌를 소멸시킨다는 ‘감로의 비’라도 한차례 내린 듯했다.
그렇게 가을이 스민 새벽 공기 속에 이런저런 차를 바꿔 타며
가야산의 품에 안긴 천년고찰 해인사로 향했다.

일즉다 다즉일, 작은 불법의 도시

해인사가 가까워지자 좌우로 우거진 나무 터널이 오랫동안 이어졌는데, 덕분에 잠시나마 세속을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터널은 일종의 일주문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긴 터널이 끝나자 마침내 나타난 해인사. ‘해인사’라고는 했으나, 여기저기 보이는 온갖 전각과 암자 때문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해인사인지 그 전모를 한눈에 파악하기란 불가능했다. 작은 사원들이 흩어져 있어 모두 보려면 며칠을 돌아다녀야 했던 앙코르와트 사원이 잠시 떠올랐다. 해인사의 첫인상은 작은 ‘불법의 도시’였다.
감사하게도 해인사 템플스테이 지도법사이신 현사 스님의 안내로 경내를 세세히 둘러볼 수 있었다. 현사 스님은 출가 이후 해인사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기에 자신은 늘 재택근무를 하는 셈이라며 농담을 던지셨다. 스님의 계속되는 농담에 스르르 긴장이 풀렸다. ‘빽빽한 숲’으로서의 총림답게 ‘군기’가 세기로 유명한 해인사여서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나 보다. 스님이 웃음을 우선 향한 곳은 해인사 산내 암자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백련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비구름이 자욱했음에도 탁 트인 시야에 눈과 정신이 시원해졌다. 화려한 백련암은 큰 바위와 소나무 숲 사이에 자리한 부처님의 궁전 같았고, 곳곳에 심긴 석조 연꽃은 내리는 비에 금방이라도 활짝 피어날 듯했다.
“백련암이 옛날에 성철 스님 계실 때는 사실 자그마했어요. 오랫동안 해인사에 다니신 보살님들은 지금 백련암에 오시면 낯설어해요. 너무 많이 변했다고.”
현사 스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이번이 첫 방문인 나로서는 성철 스님께서 머무르셨던 원통전만 봐도 평생 누더기 두 벌만 입고, 휴지 한 장도 서너 조각으로 잘라 쓰셨다는 그분의 정신을 되새기기에 충분했다. 비바람에 수없이 떨어진 도토리를 보며 문득 ‘사는 일이 어려운가. 비바람이 불면 떨어지면 그뿐. 떨어지면 굴러다니다 다람쥐 입에 들어가면 그뿐. 달리 무슨 일이 있을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오는 길에 잠깐 희랑대도 들렀다.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정원에 조그마한 장식 꽃신까지, 누구나 연신 사진을 찍게 만드는 곳이었다. 마침 희랑대 감원 경성 스님이 계셔서 삼배를 올리고 잠시 차담을 나누었다. 이 세상에 찬비 내리는 중에 마시는 따뜻한 차만 한 게 또 있을까. 희랑대에는 ‘희랑대사좌상’의 복제품이 모셔져 있었는데, 언뜻 경성 스님과 닮은 듯도 했다. 누군가 먼저 그렇게 말하자 다들 동의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우리는 희랑 대사께서 따라주신 차를 마신 것인가.

국일암은 시간이 늦어 다음날 찾아가기로 하고 길을 내려와 해인사 템플스테이 숙소인 무아정사로 돌아왔다. 화엄의 세계가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로 요약된다고 했던가. 하루 동안 여러 곳을 다니며 여러 스님을 만났지만, 그 모두가 해인사의 일부이자 해인사 그 자체였다. 빗물로 불어난 힘찬 계곡물 소리와 빗소리를 함께 들으며 하루를 반추하다 조용히 잠이 들었다.

숨겨진 고요한 암자, 국일암

이튿날 새벽 예불과 아침 공양을 마친 후 경내를 돌아다니다가 국일암을 찾았다. 들어서자마자 구조를 앙상히 드러낸 채 공사 중인 국일암 인법당이 눈에 들어왔다. 인법당은 지난 7월 해체 복원 공사 중 ‘강희 8년(1669년)’이라고 쓰인 상량문이 발견되어 현재 모든 공사가 중단된 상태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법당이라는 구체적 증거가 나왔기에 문화유산 지정 전까지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게 된 것이다.
‘국일암(國一庵)’이라는 명칭은 벽암 각성 스님이 조선 인조 때 남한산성을 축성한 공적으로 받은 시호인 ‘원조국일도대선사(圓照國一都大禪師)’에서 따온 것이다. 각성 스님의 영정과 부도도 아직 이곳에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각성 스님의 호국적 후광보다는 비구니 도량으로 그 이름이 더 높다. 스러져 가던 이곳을 각고의 노력 끝에 비구니 암자로 다시 세운 분은 성원 스님이셨다. 성원 스님 아래서 출가했으며, 현재 국일암 감원으로 계신 명법 스님께 국일암 이야기를 청했다.
“국일암은 진짜 좀 숨겨진 암자 같은 곳이었어요. 외부에도 잘 안 알려져 있고, 산중에서도 아는 분만 아는 암자였죠. 그럼에도 실제로는 굉장히 중요하고 큰 역할을 해온 암자인데, 70~90년대 들어 다들 암자를 크게 지을 때 저희 절만큼은 가난해서 개발이 안 된 거죠. 지금도 주말에 해인사 올라가는 길은 뭐랄까, 시내처럼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딱 여기로 접어들면 이거 진짜 절간이야”
스님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씀하셨다. 하긴,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부가 넘쳤다면 옛것이 이렇게 보존되기 쉽지 않았을 터였다.
“처음 여기 왔을 때 분뇨를 퍼야 해서 자연농업을 하는 후배에게 부탁했는데, 신기하게도 파다 보니 향기가 나는 거예요. 내가 농사를 지어보니 썩는 건 안 더러워. 안 썩는 게 더러운 거예요. 우리는 플라스틱이나 비닐 같은 게 깨끗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니에요. 물도 양변기를 사용하면 세 배나 더 듭니다.” 스님은 해우소 분뇨를 치우는 귀찮은 일은 아무도 안 할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아니면 누가 보존하겠어요. 문화재로 만들어 놓아야 다들 손을 안 댈 거예요.” 내년쯤엔 분뇨를 퍼서 퇴비로 쓸 거라는 스님의 목소리가 아이처럼 해맑게 울렸다.

처음의 소리를 그대로 이어 나가는 것

대화는 자연히 성원 스님과 상량문 이야기로 이어졌다. 1958년에 국일암으로 오신 성원 스님은 구들부터 시작해 쓰러져 가는 모든 것을 바로잡고 그곳을 비구니 선방으로 개설하셨다고 했다. 당시에 큰절을 제외하고 선방이 있는 곳은 국일암이 유일했다. 성원 스님은 썩은 서까래를 교체할 돈이 없어 백련암 뒤에 가서 직접 나무를 벌목하다 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는데, 약간 정신이 모자란 사람처럼 굴었더니 그냥 풀어주더란다. 그 지혜로 국일암을 지키셨다. 각성 스님의 영정도 아무나 못 들어가게 한옥 문을 자물쇠와 나무로 겹겹이 걸어 잠가 지키셨다. 그러지 않았다면 도중에 누가 팔아먹거나 잃어버렸을 것이다. 1972년 보수 공사 당시에 발견된 상량문도 한지로 정성스레 싸서 원래 위치에 다시 넣어두셨다. 국일암이 지켜진 것은 단순히 가난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을 지킨 누군가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 공간과 역사와 가치를 명법 스님이 이어 지키고 있다.
“정말 전통적인 것들이 좀 남겨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이제 (인법당도) 저대로 구들도 남긴다고 하니까 비구니 스님들이 와서 너무 잘했다며 칭찬해 주더라고요. 지금은 오히려 그게 더 친환경적이고 더 미래적인 것이잖아요.”
이후 함께 둘러본 인법당은 서까래만 봐도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요즘 같았으면 지붕에 흙을 넣어야 했을 자리에 온갖 나무를 쑤셔 넣은 것도 특이했는데, 이런 부분은 나중에 보수된 현대적 부분과 확연히 대비되어 그 차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국일암의 이런 개성은 명법 스님이 생각하는 이상적 산사의 모습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자생종이 마구 자라나는 자연스러운 정원과 밭이라는 인위적 공간의 대비. “저는 또 그런 정서가 있어요. 약간 쓸쓸하고 버려진 것 같지만, 뭔가 생명이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 이쪽 밭은 굉장히 인위적인 공간이지만 저쪽은 자연스러운 공간이 되면 절에 오는 사람들이 다른 경험을 하게 되지 않을까요.”
다시 말하지만, 무언가가 지켜진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것을 지키고 있다는 뜻이다. 지킨다는 것은 인위적 행위여서 그 자체로 영원할 수는 없겠으나, 지키는 사람이 있는 한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걸어올 것이다.
하루빨리 국일암이 문화유산이 되길 바라며 일주문을 나서는 길. 어쩐지 마음속에서 그날 새벽 예불 시간에 들었던 웅장한 법고 소리와 명법 스님의 말씀이 겹쳐 들렸다. 왜 그랬을까? 그러고 보니 법고는 두 스님이 번갈아 가며 쳤는데,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바로 교대할 때였다. 소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두 번째 스님이 와서 첫 번째 스님 옆에서 똑같은 소리와 리듬으로 치면 첫 번째 스님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형식이었다. 두 사람이 한 사람처럼 이어가는 소리. 그것도 일종의 계승이라면 계승일 것이다. 처음의 소리를 그대로 이어 나가는 것.
어쩌면 그 공명은 오래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제 다시 숨 막히는 도시로 돌아가면 예전 모습 그대로 정신없이 살아가야 하겠지. 하지만 간혹 너무 숨이 막힐 때면 이곳에서 들은 법음(法音)이 다시 서서히 소리를 높이며 숨을 틔워주리라. 잔잔해진 바다에 도장이 찍히듯, 제법의 실상이 아주 잠시나마 다시 선명히 엿보이리라. 떠나며 뒤돌아본 가야산은 여전히 하얀 비구름 모자를 쓴 채 소리 없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킬 게 있는 자에게 큰 기쁨이 있나니, 그대에게 묻노라. 그대는 무엇을 지키며 오늘을 살아가는가?”

황유원 2013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 시인이자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시집 『하얀 사슴 연못』, 『초자연적 3D 프린팅』, 『세상의 모든 최대화』 등을 냈으며, 『모비 딕』, 『폭풍의 언덕』, 『슬픔에 이름 붙이기』 등을 번역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김현문학패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