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꽃은 누가 피우는가
다정하고 무해한 봄꽃들이 지고 난 후 비로소 제 계절을 시작하는 배롱나무. 주저 없이 여름 한복판으로 출전한 무사처럼 보인다.
뒤늦은 출발을 만회하려는 듯 쉴 새 없이 붉은 꽃을 뿜어 올린다. 꽃 한 송이가 백일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가지 끝 원뿔 모양의 꽃차례에 꽃잎이 달리는데 개중엔 어제 핀 것도 있고, 오늘 막 열린 것도 있고, 오늘 저녁 떨어질 꽃잎도 있다. 한 가지에 계절이 겹겹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은 배롱나무가 가진 시간의 비밀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봄은 아직 오지 않았고, 가을은 벌써 다녀간 듯, 한 가지에서 계절이 서로를 스친다. 손등과 손바닥처럼 피고 지는 일은 분리되지 않는다.
배롱나무의 시간은 직선이 아니다. 마치 생과 사가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서로의 옆구리를 만지며 같은 숨 안에 머무는 것처럼. 꽃은 피면서 지고, 지면서 다시 피고, 그 원형의 시간 속에서 하나의 계절이 완성되고 있다. 그리하여 배롱나무 앞에 서 있으면 미래와 과거를 나누며 사는 것이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라는 무대 위에는 언제나 시작과 끝이 겹쳐 피어 있으니까.
아무리 오래 피어도 꽃은 결국 떨어지고, 수피는 자꾸 벗어져서 매끈한 속살을 드러낸다.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 사찰에서도 배롱나무를 심는 전통을 오래 지켜왔다. 배롱나무꽃은 여름 내내 피어 끈기와 지속의 덕목을 드러내며 수행자의 마음가짐과 겹치게 되었다. 수피를 벗고 매끈해지는 모습은 허물을 벗고 본성을 드러내는 수행자의 상태를 은유하는 것이다.
석 달을 꾸준히 피는 배롱나무꽃은 한 번 앉으면 끝까지 머무는 좌선의 끈기를 비유하기도 한다. 하루에 조금씩 피고 지는 방식은 매 순간 깨어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꽃이 한꺼번에 피지 않는 이유처럼 깨달음도 한 번에 완성되지 않고 조금씩 드러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한 수행자는 여름 내내 꽃을 보며 피고 지는 것이 자기 호흡과 같음을 느꼈다고 한다.
눈을 감고 어느 선사의 물음을 떠올려본다. “저 꽃은 누가 피우는가.” 꽃을 피우는 주체는 ‘꽃’이라 부를 것도 없고, ‘나’라 부를 것도 없이 피어남과 스러짐이 서로를 부축하며 일어나고 있다. 피고 지는 일이 누구의 뜻도 아닌 일이므로 피는 것도 기쁘지 않고, 지는 것도 슬프지 않다. 꽃은 다만 제때 피고 제때 진다. 무더기 꽃을 단 나뭇가지는 바람이 스치는 순간마다 소매 끝을 부풀려 허공을 베어내듯 곡선을 그린다. 그 춤은 환희와 비애, 찰나의 화염이며 피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사라짐을 향해 달려가는 ‘무상(無常)’의 몸짓이다. 그럼에도 전력을 다해 빛나는 존재의 한순간이다. 이 춤은 배롱나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바람과 빛과 잠시 머물다 가는 우리를 위한 춤이다. 꽃은 피어도 ‘나’라는 중심이 없고, 햇빛·바람·비·땅의 영양분이 모두 합쳐져 나타난 결과물이다. 이는 ‘무아(無我)’이자,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수많은 인연이 얽힌 것이니 이를 ‘연기(緣起)’라고 할 수 있겠다.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듯이 꽃도 마찬가지다. 꽃은 스스로 꽃을 피우지 않는다. 따라서 “저 꽃은 누가 피우는가?”라는 질문은 ‘무아’의 문제로 이어진다. 꽃을 피우는 주체가 인물이나 신이 아니라 조건들의 총합이므로 나 역시 그 조건의 일부임을 깨달을 수 있다. 이 순간, 꽃과 내가 서로를 피워 올리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인연과 조건에 의해 일어난다. 꽃이 피는 것도 단독 원인이 아니라 무수한 상호작용의 결과이며, 질문하는 나와 꽃 역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이다. 즉, 꽃을 피우는 것은 기온 변화이기도 하고, 질문하는 나의 의식이기도 하다. 선(禪)에서는 이 관계성을 직관적으로 체험하게 하여 분리된 존재라는 착각을 깨뜨린다. 꽃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붙인 이름일 뿐, 실체적으로 고정된 자성이 없다. “저 꽃은 누가 피우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피우는 자와 피는 것이 따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관문이며, 꽃과 나 모두 ‘자성(自性)’이 없는 공(空)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이 깨달음의 순간, 피우는 자와 피는 것의 구분이 사라진다.
나는 집 앞 공원의 흰 배롱나무꽃이 세 번 피고 지는 동안, 누군가를 절절히 미워하고 원망했다. 꽃봉오리가 맺히듯 미움은 깊이 응어리가 져서 오래 만개했다. 나는 매일 산책길에 그 꽃을 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감정을 들여다보았다. 처음엔 꽃보다 상처가 더 컸고, 그다음엔 꽃과 상처가 나란히 앉았고, 그 이후엔 꽃이 상처를 가렸다. 석 달이 지나 꽃잎이 하나둘 떨어지자 내 마음도 조금씩 비워져 갔다. 미움이 떠난 자리에 바람이 지나갔다.
햇빛 속에서 배롱나무의 마른 줄기는 오래된 상처처럼 수피를 벗어내고 있다. 나무의 속살은 매끄럽고도 불안했다. 나무 안의 오래된 얼굴을 보는 기분이었다. 잠잠히 드러난 속살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오래전 손잡고 걸었던 할머니의 팔뚝 같았다. 수피가 떨어져도 나무는 줄어들지 않고 되레 본래의 빛깔로 돌아갔다. 그 매끈한 속살을 손끝으로 건드리면, 아주 미세한 떨림이 가지 끝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배롱나무엔 간지럼나무라는 별칭이 있다.
햇빛이 나무의 몸을 따라 흘러내리며 수피와 속살을 번갈아 비춘다. 거친 표면은 세월의 흔적이지만, 그 틈에서 막 돋아난 여린 순은 전혀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늙은 나무줄기와 연한 새순이 함께하는 장면은 마치 한 몸 안에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흐르는 것과 같다. 벗겨진 껍질은 오래 버틴 겨울을 증명하고, 연둣빛 잎은 다가올 계절을 예고한다. ‘찰나생멸(刹那生滅)’이 바로 이런 모습일까. 사라지는 것과 태어나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고, 죽음과 생이 나란히, 한 줄기의 숨 속에서 숨 쉬게 된다. 꽃이 져도 꽃은 꽃이고, 껍질이 벗겨져도 배롱나무는 배롱나무다. 꽃은 스스로 지는 법을 알고, 수피는 무심히 벗는 때를 안다. 그 속도와 순간은 다르지만, 모든 벗어남과 흩어짐은 배롱나무를 배롱나무답게 완성하고 있다. 아무도 주워 담지 않는 꽃잎은 바람의 손끝에 맡겨지고, 꽃잎과 수피 또한 바람이 된다. 이 흩어짐과 벗어남은 공(空) 속에서의 충만이며, 잃어가는 듯 보이나 한 치도 덜어지지 않는 그대로의 자리이다. 마침내 배롱나무가 그대로의 자신이 되는 순간. 어쩌면 처음부터 꽃잎과 바람과 나는 한 자리에 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배롱나무꽃이 세 번 피고 지면 흰 쌀밥을 먹는다”는 말을 알려준 이는 택시 기사였다. 불갑사에 참배하러 가던 길이었다. 이 말에는 단순한 농사 달력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꽃의 개화 주기와 농사의 수확 주기를 연결하면서, 자연의 순환 속에 나의 삶이 녹아 있다는 자각이다. 나도 자연의 일부이며 내 삶도 피고 지는 하나의 계절이라는 이해를 이끈다. 결국 자연의 순환은 나의 순환이고, 나의 삶은 그 속에서 완성된다. 그날 한차례 소나기가 내렸다. 불갑사 주차장 둔덕에도 배롱나무 붉은 꽃이 한창이었다. 행여 비 때문에 꽃이 다 져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배롱나무는 가을이 올 때까지 꽃을 피우고 또 피울 것이다. 그러다가 미련 없이 져버릴 것이다. 벼도 여물면 베어지고,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젊음, 건강, 관계 — 모든 것이 변한다. 매 순간이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는 그것이 반드시 지나가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어젯밤 누군가 조용히 다녀간 흔적처럼 집 앞 공원의 배롱나무 발치에 하얀 꽃잎들이 흩어져 있다. 어느 방향에서도 완벽하게 우연이었다. 배롱나무 발치에 모여 있는 자잘한 꽃잎들은 허공을 원망하지 않았다. 허공에 피어 허공에 사라져도 허공은 언제나 허공이었다. 별안간, 몇 해 전 강에 놓아주었던 치어 떼가 생각났다. 그리고 나는 나를 용서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