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릇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김천 청암사
글. 정태겸 사진. 하지권
요리하는 현장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과연 저 빈 그릇에 어떤 요리가 어떻게 담길 것인가.
만드는 이는 무엇을 바라며 재료를 다듬고, 익혀서 음식을 만들까.
김천 청암사의 후원에서도 그랬다. 그런데 무언가 달랐다.
담은 건 비빔밥인데, 먹은 건 오래 지켜온 가르침이었다
아궁이에 불 넣어 밥 짓는 후원
청암사는 처음이었다. 사실 그 사찰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별반 없었다. 무지에 가깝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산길을 따라 굽이굽이 달려 불영산 안쪽으로 들어갔다. 호젓한 자리, 건물의 면면이 화려하지 않고 단정해서 보는 이의 시선이 더 오래 머무르는 산사가 그곳에 있었다.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맑은 계곡이 절의 가운데를 가로 질러 시원함을 더했기에 첫인상은 더욱 좋았다.
사찰을 찾아온 용무가 스님들의 끼니를 보는 것이기에 후원부터 찾았다. 비구니 스님이 머무는 곳은 어디든 정결하게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청암사도 그랬다. 눈 돌리는 곳마다 있어야 할 것이 그 자리에 놓여 있고, 불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지극히 당연한 소리지만, 이 상태를 유지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청암사는 승가대학이 있는 곳이다.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 명의 끼니를 매일 세 번 또는 그 이상 해야 하는 공간이다. 많은 양의 음식을 만드는 일은 변수가 많다.
언제 뭐가 필요할지 몰라 이것저것 구비해 놓기 마련이다.
밥 짓는 일은 청결과 위생이 첫 번째라고 하지만, 고된 일을 반복하는 일상을 살다 보면 때로는 손 한 번 더 가야 하는 일에 눈감기 마련이다. 이건 유혹에 가깝다. 많은 사람이 그 달콤한 일탈을 이기지 못한다. 이런 날이 하루가 되면 어느새 이틀이 되고 그러다 보면 원래 그런 것처럼 적당히 치우고 적당히 닦아서 사람 사는 모습이 다 그런 거 아니냐는 듯 그렇게 되어 버린다. 그게 딱히 이상해 보이지도 않게 된다. 욕심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있어야 할 게 제 자리에 잘 정리되어 있는 당연한 장면이 흔치 않다는 건 그래서다. 하물며 물이 흐르는 자리에 끼어 있을 법한 물때조차 안 보인다. 밥 짓는 사람의 마음 자세는 이런 식으로 드러난다.
연원이 깊은 절이라면 한 번씩 보게 되는 전통 후원의 모습이 청암사에도 남아 있었다. 신식 주방 시설을 갖춘 곳에서 불과 몇 발자국 떨어진 곳이다. 가마솥 네 개와 각각 딸려 있는 아궁이. 절에서 가장 놀라웠던 게 이 장소다.
편리를 좇는 시대다. 옛 모습은 그대로 두더라도 구태여 아궁이에 불을 때서 가마솥에 밥을 짓고 국을 끓일 리가 없다. 하다못해 어지간히 큰 사찰의 전통 후원에서도 가스스토브를 도입해 밥 짓는 이의 수고를 덜어주려 하고 그게 당연한 세상이다. 그런데 여기는 아니었다. 어느새 장작을 들고 와서 아궁이에 넣어놓고 불을 댕겼다. 세상에.
이 모습을 2024년에도 볼 수 있을 줄 몰랐다. 반가웠다. 지난 시대의 사라져가는 유산이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다니.
불편을 감수하고 수고롭게 빚어내는 맛
저런 전통 후원에서 음식을 한다는 건 보통 힘든게 아니다.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알 거다. 가마솥에서 무언가를 하고 나면 그때마다 일일이 바가지로 물을 부어 수세미로 씻고 물을 퍼내고 다시 물을 부어 씻고 다른 요리를 한다. 싱크대에서 설거지하듯 가마솥을 떼서 씻을 수 없으니 이게 최선이다. 불 조절은 장작의 양과 불꽃의 크기로만 가능하다. 그럼에도 그 모든 걸 마다하지 않고 지금도 그렇게 음식을 한다는 게 신기할 수밖에.
도대체 왜일까. 어째서 옛 시대의 방식을 버리지 않고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는 걸까. 후원에서 음식 만드는 일을 대부분 총괄하는 교무 혜명 스님은 말했다. “생각보다 그렇게 불편하지 않아요.”듣는 사람이 있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맛이 달라요. 번거로워도 불을 때서 가마솥에 음식을 하는 것과 가스 불에 하는 건 미묘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더라고요.” 그러고는 덧붙인다. “가스비도 비싸요.” 곁에 있던 다른 스님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삶이지만 그 수고로움에서 빚어지는 맛은 정말로 다를까. 궁금했다. 그래서 어떤 음식을 만드실 건데요?
혜명 스님은 거창한 음식을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사찰에서 먹는 음식이라는 게 세간에서 먹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강조한다. 당연하다. 산사에서 먹는 거라고 뭔가 다를 거라 바라는 건 합리적이지 않은 기대다. 출가자가 사는 세상과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다르지 않고, 자연에서 얻어지는 식재료 또한 다를리 없는데 결과물이라고 무엇이 다를 것인가. 사찰음식은 화려하고 거창한 게 아니다.
“비빔밥을 할 거예요.” 음식의 이름을 듣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비빔밥이야말로 누구나 떠올리는 ‘절에서 먹는 밥’이 아닐까. 어쩌면 가장 사찰음식다운 사찰음식이 비빔밥일지도 모르겠다.
밥 위에 올릴 고명은 다섯 가지다. 콩나물과 고사리, 오이, 당근, 고춧잎. 여름이 지나더니 청암사 텃밭에서 기른 오이가 어느새 몸집을 부풀리며 노각의 모양새를 갖춰가던 중이었다. 가을에는 고춧잎을 나물로 잘 먹지 않지만, 올해는 유난히 고춧잎의 상태가 나쁘지 않아 비빔밥 재료로 쓰기로 했다.
음식을 할 때는 늘 순서가 있다. 푸성귀부터 시작해서 색이 없거나 들어가지 않는 것, 그리고 색이 있거나 색을 넣는 것의 차례다. 아궁이의 장작이 타닥타닥 타들어 가며 불길을 올리더니 물이 자글자글 끓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씻은 고춧잎을 넣어 슬쩍 데쳐낸다. 사찰에서 먹는 음식도 한식이다. 한식은 푸성귀를 데칠 때 몇 분 동안 데쳐야 한다는 게 정해져 있지 않다. 물어보면 늘 돌아오는 대답은 ‘적당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적당히 익히면 돼요.” 처음 요리를 배우는 사람이 들었다면 뜬구름 잡는 것처럼 느낄 만한 대답이다. 스님은 설명을 붙여주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해요. 불의 세기에 현재 끓고 있는 물의 온도라든가 고춧잎의 상태라든가. 그렇게 결정하는 거예요. 눈으로 보고 하나씩 건져 직접 먹어보면서 꺼낼 타이밍을 결정해야죠.” 이러니 한식이 어렵다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시금치만 해도 그래요. 여름 시금치랑 겨울 시금치는 삶는 게 달라야 해요. 여름 시금치는 이파리가 크고 부들부들한 편이지만 겨울 시금치는 대가 짧고 이파리도 작거든요. 여름 것에 비하면 더 뻣뻣한 편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단맛이 더 강해요. 그러니 계량으로 표준화한 레시피라는 게 한식에서는 의미가 없어요.”
밥할 때만 뜸을 들이는 게 아니다
슥슥, 손이 빠른 것도 아니고 칼질이 빠른 것도 아닌데 일사천리다. 다행히 이날은 승가대학의 학인스님들이 없어서 사중에 머무는 어른스님을 비롯해 10여 명이 먹을 것만 준비하면 된다. 그럼에도 양은 상당하다. 비빔밥이 어려운 건 고명의 종류가 많을수록 손이 많이 가야 해서다. 오늘만큼은 모든 과정의 대부분을 혜명 스님이 혼자서 하는데도 전체의 흐름은 물 흐르는 듯 유려하다. 그만큼 공부하고 오래 음식을 해 왔으니 가능한 일이다.
잘 다듬은 재료는 각각 다른 그릇에 담아 준비해놓았다. 여기서 공통적인 특징이 보였다. 콩나물이든 고사리든 전부 길이가 짧다. 비빔밥에 넣는 고명은 길이까지 신경 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한 이유가 뭘까. 혜명 스님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은사스님 때문이에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눈을 휘둥그레 떴더니 한바탕 또 웃는다. 그러고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비빔밥의 고명을 길게 놔두는 건 은사인 상덕 스님이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거였다. 잘 비벼서 숟가락으로 한술 뜰 때 고명이 길면 한 숟갈에 담을 양 조절이 어렵고 딸려 올라온 것이 아래로 늘어진다. 당연히 보기에도 안 좋고 먹기에도 거북하다. 이는 먹는 사람을 위한 배려가 없는 것이니, 비빔밥의 재료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길이로 잘라서 준비하라는 게 은사스님의 말씀이다. 아하, 순간 머릿속에서 범종이 울리는 것 같았다. 먹는 이를 위한 배려는 만드는 이가 갖춰야 할 기본 아니던가. 아이를 위해 밥 짓는 엄마의 마음도 늘 그 자리에서 출발하고, 노모를 위해 준비하는 한 상도 그 바탕에서 만들어진다. 하루에 14시간씩 서서 일해야 하는 요리사도 마찬가지다. 내가 만든 걸 먹고 좋아하는 손님의 얼굴을 보는 게 좋아 그토록 고달픈 매일을 살아낸다. 돈을 내고 내 음식을 먹는 손님을 위한 배려가 그 기저에 깔려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린 우리의 일상에서 그런 사소해도 소중한 걸 잊고 있는 건 아닌지.
혜명 스님이 조리 과정에 담아둔 배려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모든 재료의 성질에 맞게 적당한 뜸을 들이는 과정이다. 나물을 데치고 오이를 살풋 볶아내는 데에도 뜸을 들인다. 생전 처음 듣고 처음 보는 광경이다. 뜸을 들인다는 건 밥 지을 때만 들어가는 품인 줄 알았다. 혜명 스님은 그렇지 않다고 목소리에 힘을 준다. 모든 건 뜸이 들어야 한다고. 각기 다른 맛과 향을 가진 재료가 각각의 요리가 되고 밥 위에 모여 하나의 음식이 되는 게 비빔밥이다. 당연히 각각의 성질에 맞춰 뜸을 들이는 게 지당하다는 논지다. 이만하면 되지 않았나 싶지만, 실은 한소끔 더 기다리는 과정에서 깊은 맛이 우러나기 마련이란다. 그걸 몰랐다.
그렇게 애써 준비한 다섯 가지를 한데 담기 시작했다. 그릇에 밥을 적당히 푸고 가지런하게 고명을 올려서 밥상 위에 오를 비빔밥을 완성한다. 만든 사람의 성정은 곱게 채 썬 모양새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도마 위에서 칼질할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게 상위에 오를 때가 되어서야 보인다. 비빔밥이 아무거나 다 넣고 한데 비벼서 먹으면 그만인 별것 아닌 음식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소중한 사람에게 낼 요량으로 만들 거라면 이렇게 크고 무거운 정성이 듬뿍 들어가야만 한다. 채를 썰어 준비한 모든 것이 다 고만고만한 굵기와 크기로 준비되었고, 적당한 소금과 아낌없이 더한 참기름으로 본연의 맛을 갖췄다. 소금물에 절여둔 오이를 썰어 물기를 뺄 때 너무 꼭 짜도 안 되고 덜 짜도 안 된다며 하나 집어 입에 넣어줄 때는 몰랐다. 그 적당한 물기조차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어떤 맛으로 다가올지를.
당신은 무엇을 드셨습니까?
혜명 스님은 신신당부했다. 글을 쓸 때 정식으로 발우공양을 할 수 없는 날이어서 약식으로 준비했음을 꼭 밝혀달라고. 조리 과정을 다 보고 나서는 발우공양을 정식으로 하든 약식으로 하든 이 날만큼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행자로서 반드시 갖춰야 할 형식이 있겠지만, 때로는 이렇게 비빔밥 한 그릇으로 대신하는 날도 있을 텐데. 근대를 넣어서 푹 끓여낸 근대국까지 담아서 대방으로 옮겨 놓고는 마른 수건에 손을 닦는다. 비로소 목탁이 울렸다. 묵직하게, 공양의 시간이 되었음을 알린다. 유난히 맑은 하늘에 햇살이 밝고 주변의 나뭇가지가 서로를 부비며 사그락거리는 시간이었다. 계곡의 물소리 졸졸 들려오는 그 사이로 혜명 스님의 은사이자 청암사 주지 상덕 스님, 승가대학장 지형 스님을 비롯해 대중스님이 대방으로 모여 둘러앉았다.
약식이라지만 발우공양은 발우공양이었다. 원하는 만큼 밥을 덜고 각기 준비한 고명을 올린다. 국도 담고 김치도 담는다. 모두의 상차림이 완성되면 합장을 한다. 나지막이 ‘오관게(五觀偈)’가 울려 퍼졌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건강을 유지하는 약으로 알며
진리를 실천하고자 이 음식을 받습니다
정식으로 발우공양을 하는 게 아닐지는 몰라도‘밥’을 앞에 두고 이 음식이 어떤 인연으로 나에게 왔는지를 생각하는 것, 이것만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그래서 오관게는 발우공양의 정수다. 먹는 행위는 엄중해야 한다. 나에게 온 음식은 맛보고 즐기는 순간의 의미로만 가벼이 머물다 사라지는 게 아니다. 나의 생명을 살리는 또 다른 생명이다. 그걸 잊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 오관게고, 그래서 먹는 일은 진중해야만 한다. 마음가짐만 변하지 않는다면, 비빔밥 한 그릇을 두고도 온전한 발우공양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청암사의 비빔밥은 고추장을 넣지 않고 간장으로 양념장을 만들어 넣는다. 이게 혜명 스님의 은사스님, 그 은사스님의 은사스님이 먹던 방식이고, 앞 전의 여러 선대 스님들이 쭉 이어온 방식이다.
어쩌면 그 역사가 100년을 넘을지도 모른다. 양념장을 덜어 넣고 비벼서 한 숟가락 떠올렸다.
늘어지는 것 하나 없이 깔끔하게 담겨서 입으로 들어온다. 모든 것이 잘 익었고, 고명은 저마다의 맛과 향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 씹으면 씹을수록 입안에서 다섯 가지가 하나로 어우러지며 또 다른 맛으로 변해간다. 여기서 오이의 진가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적당히 물기를 짠 오이는 적절하게 짠맛을 품은 채 오도독 씹히면서 비빔밥의 식감을 완성해 주었다. 고추장이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일련의 미묘한 변화가 입안에서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제야 밀려오는 생각 한 줄기. 아! 나는 사라져가는 시대의 후원이 오래 지켜온 맛을 목격하고 있구나.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이토록 오래 변함없이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가 한 그릇에 오롯하게 담겨 있었다. 비빔밥은 남겨서도 안 되지만 남길 필요가 없을 만큼 각별했다. 공양을 마친 뒤에는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을 씻는 동안 또 다른 화두를 얻었다. 그릇은 마치 나에게 묻는 것만 같았다. “배부르게 드셨습니까? 당신은 무엇을 드셨습니까?”
정태겸 음식과 사람, 문화를 사랑하는 여행작가이자 몽상공작소 대표. 공감미디어홀딩스 팀장과 KTX매거진 편집부 에디터를 거쳐 월간트래비·여행신문 등 잡지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산림청이 발간한 『숲에서 길을 찾다, 아름다운 숲』, 서울시의 『더 오래가게』를 썼다.
청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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