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연등국제선원
글. 이승훈 사진. 하지권
보슬비에 옷 젖듯 괴로움에 젖어가는 인생
겨울을 재촉하는 보슬비가 갑자기 내렸다. 강화도에 있는 연등국제선원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시간에 가까운 늦은 오후였다. 하늘은 어둑어둑하고 비를 피하기에 바빠서 선원의 모습을 제대로 눈에 담지 못했지만 비를 흩뿌리는 소슬한 바람 속에서 고즈넉한 선원의 분위기를 몸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연등국제선원에 템플스테이를 오기 전에 많은 고민거리가 내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환갑을 내일모레 앞둔 나이에 첫째 아들은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둘째 아들은 아직 다섯 살. 몇 년 전 사업 실패 이후 빚더미에 올랐었다. 겨우 작은 언론사에 취직해서 이제 빚은 해결했지만, 노후 준비는 못 했다. 어린 아들들을 어떻게 키울지 당장의 고민에 노후 준비는 계획조차 사치였다. 둘째를 대학교까지 보내려면 80살까지 현역으로 일해야 한다. 매 순간 불안했다. 최근에는 우연히 방송에서 보게 된 뉴진스님의 말이 들어왔다. “살면 살아진다”는 개그맨 뉴진스님의 인생 경험담이 격려가 되었다. ‘그래, 살면 살아지겠지. 살아봐야지….’ 그런데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선원에 오기로 한 날의 전날은 일찍 자려고 했지만 공교롭게도 갑자기 닥친 일거리 고민거리에 새벽까지 한숨을 못 자고 꼬박 날을 샜다. ‘내일 새벽 참선 시간이 4시라는데 과연 그때 일어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면서 선원에 왔다. 주지스님인 혜달(慧達) 스님이 반갑게 맞아주시며 차담(茶談) 시간을 가졌다. 스님의 외모는 인상적이었다. 큰 체구에 얼굴도 원효대사처럼 우락부락했지만, 대조적으로 스님의 눈빛은 법명에 어울리게 깊었다.
외국인 주지스님과 함께하는 선명상
연등국제선원 주지이신 혜달 스님의 외모는 영락없는 토종 한국인이지만 사실 스님은 한국인이 아닌 인도인이다. ‘인도 북부에 동아시아 인종과 외모가 비슷한 인종이 살고 있다더니….’ 스님은 인도를 방문한 한국의 한 스님의 권유로 출가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생에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
혜달 스님은 한국어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연등국제선원에 템플스테이를 경험하러 오는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선명상과 불교를 소개한다. 연등국제선원 템플스테이는 외국인이 많이 찾기로 유명하다. 내가 찾은 그날도 한국인은 나를 포함해 서너 명뿐, 나머지 스무여 명 정도는 모두 외국인이었다. 그들은 스페인에서도 오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오고 홍콩,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왔다.
혜달 스님의 소개로 선원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로 유명한 성철 큰스님의 초상이 법당 안에 있었다. 그리고 성철 큰스님의 제자인 故 원명 스님의 초상도 그 옆에 같이 있었다. 연등국제선원은 1997년, 원명 스님이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겠다는 발원으로 창건한 것으로 알려졌다. 혜달 스님은 바로 이 원명 스님의 제자라고 한다.
참가자들과 간단한 차담 시간을 가진 이후 숙소로 들어갔다. 명상하기 딱 좋은 날씨에 명상하기 딱 좋은 숙소였다. 1인 1실에 정갈한 침구들이 있었고 공부할 수 있는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1명이 쓰기에는 방이 좀 넓은 것 같기도 했다. 금세 몸이 따뜻해졌고 저녁 식사 시간까지 알람을 맞춰놓고 잠시 눈을 붙였다.
‘죽음’이라는 괴로움에 끌려가보다
잔 것 같지도 않은데 눈을 뜨니 억울하게도 순식간에 저녁 6시가 다 되어서 저녁 식사를 했다. 잠시 뒤에 20여 명의 외국인들과 같이 앉아서 30분간 저녁 명상을 했다. ‘명상? 그런데 무슨 명상을 하지?’
잠자코 눈을 감고 명상을 시작했는데 올해 봄에 돌아가신 아버지만 계속 생각났다. 평소 일에 치여 바쁘게 지낼 때는 아버지 생각이 나지 않는데 이렇게 사방 천지가 조용할 때면 아버지 생각이 난다. 나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고향에 살고 계셨는데 공교롭게도 아이들을 좀 봐달라고 어머니를 서울에 잠시 모신 때에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집에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는 얼마나 충격을 받으셨을까? ‘내가 어머니를 부르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라는 죄책감도 들었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집안 문중에서 많은 기대를 받으셨던 아버지였지만 너무나 초라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사람이 죽어서 하늘로 가면 인생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이 되어 하늘로 간다던데,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언제일까? 할아버지가 마침내 내가 태어나는 것을 보자마자 오랜 지병을 끊고 세상을 떠나셨을 때일까? 아니면 건축사업을 하면서 많은 직원을 거느리고 갓 뽑은 소나타 골드 자가용을 타고 다니시던 그때일까? 아버지는 사업이 몰락한 이후 외환위기까지 더해 그 이후로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셨다. 내가 호강시켜 드리겠다고 했는데….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불효자는 웁니다
울적한 느낌이 들어 생각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생각이 이어지지 않자 그 순간부터 몸에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여 허리도 다시 세워보고 양반다리를 바꿔 앉기도 하며 자세를 바꿔 앉고 하다 보니 명상시간 30분이 끝났다.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는데 명상을 진행한 혜달 스님은 5분 더 앞당겨 25분 만에 마쳤다고 한다. 25분을 못 견디다니 난감했다.
과거라는 괴로움으로 침잠해보다
35살 때 나는 스님이 되려고 했다. 원래 화가가 되려 했지만 뒤늦게 고시공부를 했으나 법 공부는 적성에 맞지 않았고 늦은 나이에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 고시공부를 중단하고 PC방 장사를 하기도 하고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우울한 시간이 계속되다 보니 ‘도대체 사는 게 뭔지?’ 회의감이 들었다. 그래서 남들은 2002년 한일 월드컵 응원으로 거리에서 환호하고 응원할 때 나는 머리를 빡빡 깎고 팔공산에 들어가서 1년간 도를 닦으며 스님이 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오전에는 한두 시간 동안 참선 명상하고 낮에는 산악마라톤을 두 시간씩 하고 밤에는 명리학 서적과 이런저런 책들을 읽기도 했지만 그 괴로움을 떨칠 해법은 찾을 수 없었다. 낮에 달렸던 산악마라톤은 내가 있는 곳에서 은해사 대웅전까지 약 10km, 왕복 20km의 산길을 빠르게 달리는 것이었다. 한 시간 정도 달리다 보면 은해사에 도착하고, 곧바로 은해사 대웅전 앞마당에서 합장하며 선 채로 20~30분 동안 눈 감고 기도를 했다. ‘부처님, 사는 것이 너무너무 괴롭습니다. 제발 괴롭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빌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 괴로워졌다. 그래서 나중에는 괴롭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괴롭게 만들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기억에 집착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그 뒤로는 ‘부처님 나를 생각하지 않게 해주세요, 나를 없애주세요’라고 빌었다. 그런데 그렇게 나를 생각하지 않게 해달라고 비니까 오히려 나를 더 생각하게 되었다. 이게 웬 역설인지…. 괴롭지 않게 해달라고 하니까 오히려 더 괴로워지고 나를 생각하지 않게 해달라고 하니까 오히려 나를 더 생각하게 되었다.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 괴로움이 커졌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절망스러웠다. ‘스님이 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당장은 괴로움을 벗어날 다른 그 어떤 해결책도 없어서 오전의 참선, 오후의 산악마라톤을 계속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날도 산악마라톤을 하며 반환점인 은해사 대웅전 앞에서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그날은 딴 생각을 하지 않고 은해사의 이름을 생각했다. 은해(銀海). 눈 감고 은빛 바다를 한참 생각했다. 바다에 내리는 햇빛이 난반사되어 온통 바다가 은빛으로 빛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광경을 가만히 계속 보았더니 바다가 점점 커져서 온 세상, 우주를 뒤덮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온 세상이 바다가 되었고 바다에 햇빛이 난반사되어 온 세상과 우주가 은빛으로 빛나는 광경을 한참 보았다. 세상에는 나도 그 누구도 그 아무도 없었다. 세상에는 오직 은빛 바다만이 있었다. 그 순간 괴로움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스님이 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속세로 내려와서 곧바로 운 좋게 대형 언론사에 취직을 했다.
이끌려감을 멈추는 모든 기법, 명상
오전 차담 시간에 혜달 스님에게 명상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질문을 했다. 혜달 스님은 “명상하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앉아서 명상할 수도 있고 누워서 명상할 수도 있고 산책하면서 명상할 수도 있고 밥 먹으면서도 명상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점점 비워가며 무념무상으로 명상할 수도 있고 반대로 어떤 좋은 생각을 가지고 그 생각을 점점 채워가며 명상할 수도 있다.”고 답했다. 아마도 내가 팔공산 은해사 대웅전 앞에서 했던 명상은 비워가는 명상이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 온 세상이 은빛 바다가 되는 광경은 채워지는 명상이기도 했다. 오전 명상 시간에는 혜달 스님이 알려주신 명상 방법 하나를 시도해 봤다. 아무 생각 하지 않고 호흡에만 집중했다. 낮고 깊은 호흡으로 숨을 내쉬고 또 들이마시고 하다 보니 아버지의 죽음이나 당장 먹고살 고민, 오지 않는 잠이나 노후 걱정 같은 생각이 나지 않고 마음이 편해졌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다시 생각해 본다. 생각해 본다는 생각이 함정이었을지 모른다. 그저 낮고 깊은 호흡으로 숨을 내쉬고 또 들이마시고…, 내쉬고 또 들이마시고…. 연등국제선원의 정원은 소박하게 아름다웠고 날은 이미 겨울이 되었다.
이승훈 한겨례, 민주노총과 조선일보, 중앙일보 조인스닷컴(jtbc스튜디오) 등에서 기자와 편집장, 뉴미디어연구소장 등으로 일하고 현재 평판관리컨설팅 회사 레마코리아 대표, 시사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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