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아도 품이 큰 암자
통도사-극락암-자장암
글. 성재헌 사진. 김성헌
양산으로 향했다. 통도사, 오래전 잠시 머물다 한참이나 발길을 끊었던 곳이다.
“내가 알던 사람들이 지금도 있을까….”
운전대를 잡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만감이 교차하였다. 예전에는 익숙했던 그곳이 더는 익숙지 않으리란 불안감, 그 낯섦이 괜히 싫었다.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산문(山門)으로 들어섰다. 겨울을 코앞에 둔 영취산계곡은 붉은 단풍빛으로 곱고도 서늘했다.
담장 너머 줄줄이 이어진 기와지붕을 바라보며 개울을 건넜다. 삼성반월교(三星半月橋), 세 개의 점이 별처럼 늘어서고 한 획이 반달처럼 사이를 꿰뚫었으니, 마음 ‘심(心)’의 파자(破字)이다. 심교(心橋), 마음속 분분한 번뇌의 강물에 젖지 말고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라고 만든 다리이니, 그 이름이 멋들어지다.
‘영취산 통도사(靈鷲山通度寺)’
일주문을 장식한 흥선 대원군의 고아(高雅)한 글씨가 여전한 통도사의 품격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었다.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필체에 감탄하면서 그 앞을 서성일 때였다. 노스님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터벅터벅 걸어오셨다. 신문지상에서 자주 뵈었던 통도사 前율주 혜남 스님이셨다. 두 손을 모으고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통도사는 신라 시대 자장 율사(慈藏律師, 590~658)에서 시작된 해동율맥(海東律脈)의 본산이다.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1400년을 이어온 전통이니, 그야말로 율지종가(律之宗家)이다. 그런 종가의 어른이시니, 삼엄함을 넘어 그 기상이 살벌한 분일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허리를 잔뜩 굽혀 인사하는 모습이 기특했는지, 스님께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안경 너머로 지긋이 바라보셨다. 그 눈매가 참 따듯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신지?”
“저는 신문과 방송에서 스님을 자주 뵈었습니다.”
“허허, 나같이 못난 사람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네. 혹 명함이 있으면 하나 주시오.”
멋쩍어하며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제가 못나고 변변치 못해 여태 명함이 없습니다.”
혹 불쾌하게 여기시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는데, 스님의 반응이 의외였다.
“나도 평생 등신으로 살았는데 자네도 그런가? 그럼, 우린 좋은 친구네.”
빙그레 웃으시더니 내처 지팡이를 짚고 삼성반월교로 향하셨다. 그 웃음이 향기로워 스님의 뒤를 바짝 쫓으며 건너온 다리를 다시 건넜다.
“저야 진짜로 어리석은 사람이지만 스님께서는 어리석은 척하며 사시는 게 아닌가요?”
“아니야, 시늉하는 게 아니라 나는 진짜 무능한 사람이야. 남들이 먼저 알아. 게다가 세상일에 도통 관심이 없어. 「식심명(息心銘)」에 ‘아는 것이 많으면 일이 많고[多知多事], 걱정이 많으면 잃는 것이 많다[多慮多失]’는 구절이 있어. 나는 어려서부터 그런 글이 좋대.”
초면의 나그네에게 속내를 털어놓으시면서도 스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시다. 그리고 한마디 하셨다.
“자네는 자네 일 봐. 나는 약속이 있어.”
짧은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우두커니 서서 스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일까?”
그러고 보니 꼭 해야 할 일이 내겐 딱히 없었다.
통도사를 구석구석 돌아보려던 처음의 계획도 꼭 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꼭 해야 할 일이 없다면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건너온 다리를 다시 건넌 김에 내쳐 산길로 향했다.
개울을 끼고 몇 굽이 돌아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차밭에 에워싸인 국제템플스테이관을 지나 한 고개 넘어서자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졌다. 독수리가 날개를 펼친 듯, 산줄기를 가로 쭉 뻗은 영취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반반한 제법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깊은 산 안에 이렇게 넓은 들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막 싹을 틔운 보리의 싱그러운 초록빛을 밟으며 극락암(極樂庵)으로 향했다.
극락암에 주석하셨던 경봉(鏡峰, 1892~1982) 큰 스님께서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대뜸 이렇게 물으셨다고 한다.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노?”
어떻게 답해야 할까? 길이 없다는 노스님의 일갈(一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행복의 나라로 가는길을 찾는 나그네, 그것이 나의 모습이다. 노스님의 말씀을 곱씹으며 낙락장송이 우거진 산비탈로 접어들었다. 하늘을 가릴 만큼 가지를 높이 뻗었으니 한여름에도 이 길은 그리 덥지 않고, 사시사철 짙푸르니 한겨울에도 이 길은 그리 춥지 않으리라. 터벅터벅 걸으며 바람에 씻기고 솔 향기에 젖다 보니, 가슴속이 절로 상큼해졌다.
‘어쩌면 극락을 찾아 걷는 이 길이 극락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할 때쯤 극락암에 닿았다. 푸른 대밭에 푸른 솔로 에워싸인 극락암, 야무진 뼈대를 통째로 드러낸 영취산 준령을 법당이 불끈 짊어진 듯한 풍광이 가히 장관이다. 동그란 연못 옆에는 속이 시커멓게 썩은 늙은 감나무가 홍시를 주렁주렁 매달고, 여여문(如如門) 왼쪽 바위엔 어린아이가 손가락으로 긁적거린 듯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관산청수(觀山聽水), 그 글귀가 동네 어귀에서 만난 자상한 할아버지의 음성처럼 들렸다.
“이곳에 오셨걸랑 모쪼록 산을 바라보고 물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마당에 풀어놓은 토끼에게 먹이를 주던 암주 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노스님의 거처였던 삼소굴(三笑窟)로 향했다. 스님은 사람을 대하는 게 영 익숙지 않으신지 햇볕에 달궈진 마룻장만 한참 쓰다듬으셨다. 한 말씀 부탁드리자, 스님께서 입을 여셨다.
“뭐, 딱히 할 말이 있나요? 그냥 조용히 와서 가만히 앉아 있다가 조용히 가면 되지요.”
무던한 그 말씀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나도 입을 닫고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짱짱한 솔밭 너머로 겹겹이 쌓인 준령이 눈길도 닿지 않을 만큼 아득하다. 그 사이에 마을이 있고, 도로도 있고, 사람도 있을 텐데,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마음이 편안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산이요, 들리는 것이라고는 물소리뿐이니, 저절로 관산청수(觀山聽水)이다. 입을 닫아야 새소리 물소리가 비로소 들리고, 잡다한 생각을 쉬어야 장구한 산세가 비로소 눈에 들어오니, 번뇌의 강은 이렇게 건너는가 보다. 스님께서 직접 키운 채소로 맛있는 점심을 먹고 내려오는 길, 노스님께서 자주 하셨다는 말씀이 환청처럼 들렸다.
“개똥에 엎어지지도 말고, 소똥에 자빠지지도 말고, 잘~ 가거라.”
푸른 솔밭을 내려와 보리밭을 가로질러 자장암(慈藏庵)으로 향했다. 108계단으로 이어진 가파른 벼랑을 오르자, 암자가 나타났다. 이 암자에는 유명한 전설이 하나 있다.
그 옛날 자장 율사께서 이곳에서 수행할 때 일이다. 큰 바위 아래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석간수(石間水)가 흘러 식수로 사용하였는데, 개구리 한 쌍이 물을 휘저어 혼탁하게 하고는 하였다. 그래서 자장 율사가 바위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고는 그 개구리를 들어가게 하면서 “너희는 이곳에서 살아라.” 하셨다고 한다. 그 후 입에 황금빛 테를 두른 개구리 한 쌍이 천년 세월이 넘도록 그 바위 구멍에서 살아 사람들이 금와보살(金蛙菩薩), 즉 황금 개구리 보살이라 부르게 되었다.
극락암 삼소굴
자장암
자장암 금와보살
관음전에 참배하고, 곧장 법당 뒤쪽으로 향했다. 깎아지른 바위에 정말 손가락으로 푹 찌른 듯한 구멍이 있고, 그 구멍에 작은 개구리 한 마리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신기했다.
마침 절 마당에서 이 곳의 암주이신 지원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아기처럼 환하게 웃는 스님은 환갑을 넘긴 연세에도 볼에 홍조가 가득하셨다. 스님께서 친절하게 이것저것 알려주셨다.
“이 암자는 거북이 등 위에 올라탄 형국입니다. 관음전 바닥 마루 사이로 바위가 튀어나온 게 보일 것입니다. 그게 등입니다. 금와보살이 머무는 바위가 머리이고, 꼬리는 마당에 있지요.”
처음 뵙는 분인데도, 스님은 어제 본 사이처럼 편안하고 익숙했다.
금와당(金蛙堂) 넓은 마루에 걸터앉아 스님께 여쭈었다.
“자장암은 전각들이 다 작네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옛날에는 암자의 요사와 전각들이 대부분 낮고 자그마했습니다. 은사 스님께서 도량을 정비하시면서 규모를 늘리지 않고 옛 풍모를 최대한 유지하려고 애쓰셨지요. 저 향경다실(香經茶室)도 예전 초가에서 규모를 늘리지 않고 수리만 하셨습니다. 커서 좋은 점도 있지만 작아서 좋은 점도 많습니다.”
“작아서 좋은 점이 무엇입니까?”
“부담이 없지요. 대궐 같은 기와집에 사는 친구는 쉽게 찾아가기 어렵습니다. 괜히 주눅이 들지요.
하지만 싸리 울타리 초가집에 사는 친구 집은 내 집처럼 드나들게 됩니다. 저는 사람도 건물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너무 잘난 사람도 너무 웅장한 법당도 까마득하게 올려다보아야 하는 불상도 부담스럽습니다. 자기 집 안방처럼 편안히 머물다 가게 하는 것이 주인의 도리지요.”
스님의 첫인상에서 느낀 편안함도 평소 이런 삶의 태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외형(外形)보다 내실(內實)을 중시하고, 사치(奢侈)보다 절제(節制)를 미덕(美德)으로 여겼다.
다들 겉치레에 치중하여 포장하고 자랑하기 바쁜 세상에서 선조들의 아름다운 전통을 고수하는 분이 계신다니, 반갑고 뿌듯했다. 존경심을 표할 말이 뭐 없을까 하다가 한마디 꺼냈다.
“스님께서는 겸손이 몸에 배신 것 같습니다.”
그러자 너털웃음을 터트리셨다.
“웃음만 많고 나이만 헛먹었지 저는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습니다. 부끄러움이 많아 남들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말도 서툽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스님께서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제가 여기서 산문을 나가지 않고 천일기도를 한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제가 머리 깎고 법복만 입었지 부처님 가르침은 하나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외형도 학벌도 지식도 다 소용없습니다. 발밑에 떨어진 휴지 하나도 주울줄 모른다면 『금강경』을 줄줄이 읊고 주장자를 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웅변은 침묵만 못 하고, 백번의 깨달음도 한 번의 실천만 못 합니다.
…… 얼마 전 불전함에 200만 원이 든 봉투와 편지 한 통이 있었습니다. 27년 전, 한 청년이 자장암 시주함을 털어 3만 원을 훔쳐 갔답니다. 며칠뒤 또 훔치러 왔다가 은사 스님께 들켰는데, 은사스님께서는 한마디 질책도 없이 눈을 감은 채 고개만 좌우로 저으셨답니다. 27년의 세월이 흘러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청년이 그날의 일을 잊지 않고 죄송하다는 편지와 함께 200만 원을 놓고 간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지요.”
스님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금와당 넓은 마루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한눈에 들어오는 영취산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된서리 내리고 찬바람 불면 곧 사라질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 인생의 마지막도 딱 저만큼만 아름다우면 좋겠네.”
성재헌 동국역경원 역경위원을 거쳐 한국불교전서 번역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부처님 생애』, 『청소년 불교입문』 집필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저서로 『커피와 달마』, 『붓다를 만난 사람들』 등이 있다.
양산 통도사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로 108
055-384-70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