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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인 것 같은 숲에서
만나는 변화들

백암산 백양사

글. 홍석환 사진. 하지권

“부처님의 연기라는 것은 관계가 형성되는 것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이라는 것이,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본다’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인식하는 대로 달라지는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백양사 성보박물관장 동참 스님의 첫 말씀을 새기며 늘 마음에 담은 물음을 스스로에게 다시 던진다. 숲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 숲에서 나는 무엇을 얻으려 하고, 무엇을 보려는 것일까?

산사로 들어간다는 것은 숲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와 같다. 언제나 숲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사찰도 마찬가지다. 시간에 의해 변화되지만 마음에서는 절대 그러하지 않을 것이라는, 찾으려 하는 진리를 담고 있는 곳이 사찰이고 숲이다. 세속의 모든 욕망을 잊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것이 아닌, 오랜 시간의 향기가 있는 사찰과 숲을 찾는 것이리라.

여전히 평온한 숲

백양사의 시작은 학림마을에서부터다. 오랜 과거에는 학림마을이 사하촌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곳부터 마을이 형성되는 조건인 넓은 평야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학림마을에서 약수천을 따라 오르는 길은 양옆이 모두 급경사의 산림이라 농업 중심의 마을이 형성되기는 어려운 구조이다.
처음 창건할 당시, 일주문을 지었다면 학림마을이 끝나는 바로 그쯤, 백양사로 들어가는 숲이 시작되는 초입 어디쯤이 가장 적합한 장소였을 것이다. 백양사 일주문을 이곳 어디에 새로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은 그래서 강하다.

급경사 산림 사이의 협곡이지만 마을에서 백양사까지는 경사가 완만한 평지형의 길이다. 옛 멋을 찾는다면 마을에서부터 걸어서 마음을 가다듬는 과정을 찾는 편이 맞겠다. 하지만, 자동차도로가 걸어야 할 길을 모두 채우고, 계곡이 자연의 스스로 그러함을 잃은 지금은 그저 마음에만 담을 수 밖에 없지 싶다. 약수천 계곡의 흐름을 고정한 인공 돌쌓기 제방 사면이 자연의 구조로 바뀌고, 도로변에 심어진 벚나무 가로수길이 단풍나무 그늘로 가득해지고, 그 아래에 백양꽃이 흐드러진 가을 풍광이 일주문을 들어서며 펼쳐지길 기대해 본다. 다만, 지금은 백양사가 예전에 그랬을 법한 걷고 싶은 길의 경관을 머릿속에서만 그리며 너무나 이질적으로 바뀐 이 길을 그렇게 자동차로 빠르게 이동할 뿐이다.

자동차로 빠르게 이동하면서 주변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해도 하천변으로 어수선하게 늘어진 상가들과 국립공원 시설들의 산만함을 길게 지나야 하는 불편함은 못내 버릴 수 없다. 그럼에도 백양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는 천년사찰의 맥을 이어온 역사를 고스란히 품은 평온함이 반긴다. 일주문이 없어도 부처님 세상으로 들어가는 너무나 아름답고 극적인 과정이 펼쳐지는 것이다. 사방이 숲의 병풍으로 둘러싸여 마치 1,400년 동안 아무런 변화도 없이 언제나 그대로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풍광이 시작된다. 숲의 온화함과 부드러움을 마음껏 발산하는 갈참나무 고령목들이 일주문을 대신해 속세의 산만함을 씻어내기에 그렇다. 우리나라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고령의 갈참나무숲이 이곳에 없었다면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그런 극적인 반전이다.



백양사는 북쪽 높게 솟은 백암산을 중심으로 날개를 오므린 새의 품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형상이다. 백암산을 중심으로 남서 방향으로 사자봉을 따라 가인봉으로 날개의 한 축이 내려가고, 남동 방향으로는 백암산에서 백학봉으로 내려와 곡두재를 지나 옥녀봉으로 반대편 날개의 축이 이어진다. 넓게 벌린 양 날개가 그 끝을 백양사 남쪽에 위치한 국립공원 백암사무소 즈음에서 다시 오므려 맞잡는 형국이다.

우리나라 숲은 식물이 활발하게 자라는 여름철에는 생육에 가장 중요한 물과 햇볕이 풍부하고, 반대로 식물이 휴식을 취하는 겨울에는 물이 적고 햇볕도 적은 전형적인 온대 기후대에 속해 있다. 여름철이 고온다습한 온대 기후대이기 때문에, 이런 지역에서는 인간의 어떤 심한 간섭이 없으면 필연적으로 낙엽활엽수림이 온 숲을 덮으며 발달하게 된다. 오래된 낙엽활엽수림이 평형을 이루는 숲, 그 숲이 우리 후손이 이 땅에서 다시 함께할 수 있는 숲의 모습인 것이다.

간섭은 필연적으로 변화로 이어지는데,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의 나무를 베어낼 수밖에 없었던 과거 우리나라의 활엽수림은 사람이 감히 접근할수 없는 몇몇 험준한 산림 빼고는 없었다. 땔감을 확보해야만 했기에 많은 산은 나무가 자라지 못할 정도였고, 자란 나무가 숲을 이루기 전에 또다시 베어냈기에 거친 환경에서 자라는 소나무림이 발달했다. 그리고, 이 소나무 숲이 지금까지 우리 숲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결국,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우리나라에서 당연히 발달했던 활엽수 숲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졌다. 최근 소나무 숲의 빠른 쇠퇴와 함께 활엽수가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원래 그러했던 숲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안타깝지만, 우리 세대는 이러한 과정이 완성된 이후를 보지는 못할 것이다.

백양사는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활엽수 숲이 안정적으로 발달해있던 그런 숲이었다. 주변의 숲이 모두 베어졌어도 지금의 국립공원 백암사무소 위쪽부터 내장산 깊은 곳까지 활엽수림이 발달해 있었다. 학림마을의 인구가 많아지면서 백암사무소 아래까지 나무가 없어지고 경계가 형성되었는데, 이와는 대비되는 숲이었다. 아마도 먼 과거에는 그 활엽수 숲의 날개가 더 길게 이어져 학림마을에서 겹쳐졌으리라 추측된다. 이렇게 산문은 자연스럽게 학림마을 초입이 된다.


부처가 된 자연의 생명들

“인간이 사는 세상은 모순의 세상인데 달리 말하면 욕망의 세상입니다. 욕망대로 사는 인간을 우리는 중생이라 하고, 욕망을 잘 다스리면서 사는 사람을 수행자라 하고, 욕망을 완전히 해결한 사람을 보살이나 부처라고 합니다. 지구의 모든 생명은 죽으면 흩어지고, 흩어진 것들이 다시 모여 생명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니 모든 생명이 동등 합니다.”

동참 스님과 함께 걷는 백양사 숲길은 또 다르게 다가온다. 인간과 동등한, 아니 우리 인간들보다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욕망을 다스리며 부처가 된 자연의 생명들을 만나러 가는 길로 비친다. 스님의 첫 발걸음은 경쾌하게 갈참나무 고목으로 향했다. 백양사를, 내장산을 대표하는 단풍나무나 비자나무로 향하지 않음이 반가울 따름이었다. 경쟁이 한창인, 어쩌면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해야 하겠다는 욕망을 한껏 발산하고 있는 어린 나무숲보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려놓은 격을 갖춘 숲의 어른에 먼저 인사를 올려야 한다는 마음 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애써 묻지는 않는다. 이 느낌 또한 나 스스로 가진 욕망일지 모르기에 그렇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갈참나무 고목을 마주하며, 1,400년 동안 백양사가 겪었던 수많은 변화의 역사를 잠시나마 생각해 본다. 격변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서도, 마치 처음부터 변하지 않았고 또 변하지 않을 것처럼 굳건히 서 있음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갈참나무숲을 지나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푸르름이 한창인 단풍나무숲이 펼쳐진다. 곳곳에 역시 청록을 뽐내는 비자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한참을 더 햇볕을 받아도 괜찮다며 아직 짙은 청록의 잎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단풍나무와는 달리, 그 아래에는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단풍색이 선명한 백양꽃이 활짝 피어 대조를 이룬다. 사찰 경내를 벗어나고 많은 비자나무가 활엽수들과 어우러진 백양계곡길로 들어서면서부터는 경사가 조금 급해진다. 백양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비자나무숲은 백양사에서부터 약사암, 천진암 사이에 집중된다. 요즘처럼 한꺼번에 나무를 심은 것이 아니라, 적정하지 않은 곳에 싹을 틔운 어린 비자나무를 숲의 빈 공간에 조금씩 옮겨심는 작업이 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이어진 결과로 형성된 숲으로 보인다. 벌이가 되기에, 좀 더 윤택한 삶을 위해 숲속에 꾸준히 심어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자연과 사람이 함께 만들어간 숲. 그래서 변화는 있지만 자연스럽다. 숲은 또 그렇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조화를,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1980년 이곳 백양사에서 출가하여 다시 돌아온 동참 스님 또한 이 변화를, 조화를 마음속에 품고 계시리라.


내장산 숲의 아름다운 원형

긴 시간 동안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만들어낸 깊은 산사의 저녁은 평온함 그 자체이다. 사람이 만든 백양사 쌍계루가 자연이 빚어낸 백학봉과 연결되며 만들어내는 경관은 이 조화를 더욱 특별하게 한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보살피며 만들어낸 조화로움 속에서 밤을 맞으며 도시에서 만들어진 마음을 덜어내 버릴 시간을 갖는다.

이튿날 아침, 자연과 교감할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의 코스는 백양사에서 약사암으로 이어지는 비자나무숲과 함께, 내장산 숲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를 기대하는 백양계곡을 따라 걷는 길이다. 백양꽃이 아름답게 펼쳐진 운문암을 지나 북쪽 능선에 올라선 후 에는 주봉인 백양산의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꺾은 후, 사자봉을 거쳐 청류암을 지나 내려오는 코스를 택했다. 이후 천진암 주변의 비자나무숲에서 맑은 호흡을 하며 하루를 마치는 여정이다.

“백양사의 아름다운 공기, 백학봉의 아름다움, 나무에서 들리는 온갖 생명의 소리들은 누가 가져 가라고 하지도 않고, 가지지 말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가지면 내 것이 되고, 내가 느끼면 내 것이 됩니다.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 도시에 있던 마음을 버려야 하는 거지요. 나와 같은 생명인 자연과 교감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숲을 찾으면 됩니다.”

자연의, 숲의 시간은 사람의 시간과는 다르다. 우리의 한 삶은 100년이 채 되지 않지만, 숲의 한 삶은 그 열 배는 족히 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동안 자연과 균형을 맞춘 숲은 한 인간이 인식할수 있는 50년 남짓의 짧은 시간 동안에는 변화를 거의 인식하기 어렵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숲은 늘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경험적으로 너무나 빠른 숲의 변화와 마주하고 있다. 어린 시절 보았던 숲과 지금 숲은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이다. 늘 그대로 있는 것 처럼, 한 사람의 삶의 기간에는 좀처럼 보이지 않아야 하는, 그런 숲의 변화가 너무 빠르게 나타나는 것이 지금 우리 숲의 현실이라는 의미다. 왜 그럴까?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숲은 전제가 따른다.
사람이 크게 건드리지 않은 숲이라야 한다. 일정 정도 숲을 이용하고, 또 숲을 변형하는 관계의 형성은 괜찮지만, 톱이라는 장비는, 포크레인이라는 장비는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장비가 들어가지 않은, 사람과 자연이 서로 용인할 만큼만 서로의 관계를 형성한, 그런 숲을 볼 수 없기에 우리는 지금 빠르게 숲이 변하는 과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산사로 들어갈 때는 언제나 그대로 있는 숲과 마주하기를 바라며 걸음을 딛는다. 인간의 폭리만을 위한 과격한 관계가 아닌, 자연을 존중하며 만들어낸 경관이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한다. 우리 숲에서 그런 기대를 할 수 있는 숲이 몇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을 가지고 태어난 순간부터, 인간은 몸을 보호하는 본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먹고, 입고, 잠자는 의식주의 해결은 아무리 모든 욕망을 버린다 해도 살아있는 한 유지해야만 한다. 어느 정도의 자급자족이 가능한 곳에 입지한 백양사이지만, 가난했던 시절을 버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나 다른 가솔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했을것이다.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게 숲이 유지되었던 곳인 만큼, 이 숲의 나무는 소위 돈이 되는 그런 숲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힘들었던 시절은 아마도 나라를 빼앗긴 35년간의 일제 식민 지배 당시였을 것이다. 백양사는 짧다면 짧은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무려 11차례나 되는 벌목 허가를 받아 곳곳에서 벌채가 이루어졌다. 당시 우리나라 모든 사찰 중 가장 많은 벌채 허가 건수였다. 숲의 나무가 훌륭했기에 그러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벌채의 주된 목적은 교무원(현 총무원) 납입금 마련을 위해서였다. 일제 강점기, 모두가 가난하고 여유가 없던 시절을 살아가기 위한 고육책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숲에 들어서면 마치 1,000년 넘게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있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 상처는 이미 많이 아물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치유되어 있다.
다행히도 일제강점기 대규모로 벌목이 진행된 이후부터는 지금까지 또 다른 큰 훼손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백양사를 본래부터 품고 있었을 숲의 원형을 찾아가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자연 스스로의 치유 과정을 보는 것은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계곡 곳곳에 군락을 형성하면서 자라오르는 굴거리나무군락을 마주하는 것이 바로 그 기쁨이다. 교목의 낙엽활엽수가 우거진 후에, 그 낙엽활엽수가 매해 만들어낸 낙엽이 오랫동안 두텁게 쌓이고, 또 그 이후에 낙엽이 썩어 부엽토가 되면서 토양을 따뜻하게, 습하게 만든 이후에라야 자라날 수 있는 상록활엽수 군락이기 때문이다. 굴거리나무군락이 형성된 주변으로 수십 년 전 심었을 밤나무들이 아직 함께 자라는 것을 보는 것도 이 숲의 격동기 역사를 살필 수 있는 흔적들이다. 이러한 흔적들을 살피며 걷는 백양사 숲길은 과거 언젠가 깊은 상처가 있었지만, 이제는 기억이 가물거리는 우리 삶의 기억을 더듬어가는 과정과도 같아 보인다. 아픈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아름다움으로 남듯이, 백양사의 숲도 회복의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특히, 가을에 더욱 싱그러워 보이는 어린 단풍나무들과 굴거리나무들이 그렇다.

다시 상생하는 나무들

정착 농경사회로 오랫동안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호남지역은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 곡창지대를 상상하게 한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 수 있는 환경이었기에, 많은 땔감이 필요했을 터이다. 자연스레 백두대간의 험준한 산줄기 주변 지역보다 숲은 빈약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숲의 발달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지도인 일제강점기 조선임야분포도를 살펴보면 반전이 일어난다. 1910년에 제작된 이 지도에서는 북한을 제외하고, 당시 우리나라에서 큰 나무가 가장 폭넓게 수림대를 형성하고 있던 지역은 내장산 일대에서 덕유산까지 연결되는 백두대간~호남정맥 구간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른 약사암에서 안개가 흐릿하게 가린 백양사를 바라본다. 급한 산길을 오른 후,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심장 소리와는 달리 고요함 그 자체로 다가온다. 약사암에서 백양사를 바라보노라면 전혀 길도 없었을 그 옛날 어떻게 절터로 이 자리를 찾았는지, 그 혜안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깊은 산골짜기에 일반인의 접근을 쉬이 허락하지 않았을 백양사의 입지는 절묘하다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다. 높고 험준한 산줄기에 둘러싸여 있으며, 백암계곡의 풍부한 물줄기가 백양사를 감싸고 휘돌면서 동쪽 천진암 앞을 내려오는 계곡과 만나는 곳에 쌍계루가 서 있다. 이후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오는 계곡들이 짧은 구간에서 만나며 주변으로 경작이 가능한 평지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다. 외부인의 접근을 쉬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자급하며 살아갈 수 있는 지형 조건을 갖추었는데, 수행 사찰의 입지로 이보다 좋은 곳이 없을 정도다. 절묘한 지형적 구조와 풍부한 자원은 창건 이후 1,400년을 이어 온 거대한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이 긴 세월 동안 자연은 그대로 있어 주었을 것이지만, 또 그렇지는 않았음을 비자나무의 확산 모습에서, 산꼭대기까지 심어진 밤나무의 흔적들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굴거리나무군락에서 찾을 수 있다.

벌목 이후 다시 자란 나무들이 쓰러지면서 더욱 건강한 숲으로 변하고 있는 백양사의 숲에서 얻는 또 다른 기쁨은 쓰러지는 생명들에 의지해 살아가는 생명들을 만날 수 있다는 데 있다. 숲을 걷는 내내 딱따구리들이 나무줄기에서 먹이를 찾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자연은 그 속에서 늘 긴장하겠지만, 우리는 그 긴장 속에서 평온함을 느낀다. 템플스테이의 매력이 아닐 수 없다.

그 누구와도 다투지 않고
그 무엇과도 겨루지 않으며
자신을 뽐내지도 않고
과격하지도 않으며
공(空)에 투철한 채
오직 여래(如來)의 길로 간다

- 동참 스님 글

 홍석환 부산대 조경학과 교수이자 환경·생태계획 분야의 전문가다. 숲의 생명력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숲의 역할을 깊이 고민해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 기후재난연구소 공동대표이자 조계종 환경위원회 위원, 영축총림 통도사 환경위원회 위원이다.

백암산 백양사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백양로 1239
061-392-0434
http://www.baekyangs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