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기록
조계산 송광사
글. 홍석환 사진. 하지권
산사에 들어서며 마주하는 첫 공간
남도의 아름다운 조계산을 사이에 둔 송광사와 선암사. 두 사찰의 송사로 인한 기록으로부터 시작되었을, 숲에 대한 세세한 관심의 발자취는 그 이전의 역사까지 아우르며 우리나라 그 어느 사찰숲에서도 볼 수 없는 꼼꼼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이 기록들로 인해 자칫 잊혀질 것 같았던 사찰숲의 역사가 우리에게 온전히 다가오게 되었다.
산사를 찾는 이들에게는 어느 순간 경건한 공간에 들어왔음을 인식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나름의 시작점이 있으리라. 산사를 찾겠다 마음먹은 때가 될 수도 있겠고, 집을 나서는 시간부터가 될 수도 있겠다. 누군가는 일주문을 지나면서, 혹자는 사천왕문을 지나면서일 수도 있겠고, 잘 다듬어진 석탑을 마주하고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을 벗어나 공간으로 눈길을 돌리면, 번잡한 속세의 마음을 씻는 산사의 시작은 대체로 일주문을 마주하는 곳에서부터라 생각할 것이다. 또 달리 현대의 생활패턴에 맞추어 생각하면 먼 옛날, 하마석이 했던 역할을 주차장이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많이 희석되었지만, 산사에 들어서며 처음으로 마주하는 공간은 언제나 아름다운 계곡과 숲이었다. 사찰 창건 이후부터 아주 조금씩 자리를 잡고 마을로 커갔을 사하촌이 대개 계곡의 한참 아래에 형성되어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사의 입구를 숲으로 보았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던 구조이다. 완충이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들어가기에 앞서 마음을 씻는 여분의 시간이 필요한 만큼 걷는 공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산사에 들어서며 마주하는 첫 공간
초입에서 마주하는 계곡 숲은 이제는 사찰 내부에 큼지막하게 조성된 주차장까지 차를 몰기에, 그저 스쳐 지나가는 눈길 조금 주는 공간이 된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공간이기에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걸어가는 시간을 찾길 바란다. 그래서 송광사를 찾을 때는 옛 매표소 앞 주차장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 자동차로 더 깊숙이 들어가는 것은 산사에서 얻길 바라는 평온함의 절반을 버리고 시작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송광사 가마터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이제 모두 잎을 떨군 겨울의 나목들은 이곳 송광사의 흥망성쇠를 모두 지켜보면서 지금도 묵묵히 한 자리씩을 지키고 있다. 안타깝게 몇 그루 남지 않았지만, 가장 오랫동안 송광사에 드나드는 이들을 지켜봤던 느티나무와 졸참나무들이 과거의 깊고 높은 계곡 숲의 터널을 상상하게 만들고 있다. 이들과 함께하던 고목들이 어느 순간엔가 사라지고, 이제는 사람을 위한 길로 변화되었지만, 그 역사의 긴 굴곡을 그저 몇 줄의 글로만 바라봐야 하는 짧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 나목들에게 긴 얘기를 물을수 없는 처지를 한탄할 수밖에 없다.
“1951년 5월 12일 사찰에 불이 나서 중심부에 있던 건물부터 불상, 불화 등 모든 게 불타 없어졌어요. 그리고, 이때 (송광사의 역사를 기록했던) 송광사고의 원 사료가 모두 함께 불탔어요. 그래도 당시 스님들이 원 자료를 정리해 두었던 책을 가지고 갈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사찰을 복구할때 (55년 이후)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이었을 텐데도 먼저 복구한 곳이 대웅전도 아니고, 요사채도 아니고 박물관이었다는 것은 송광사의 자랑인겁니다.”
오랜 시간 홀로 암자 터와 숯가마 터를 찾아 조계산 전역을 샅샅이 찾아다니시던 송광사 성보박물관 관장 고경 스님께서 풀어내는 송광사 역사 이야기는 그 기억을 꺼내는 이도, 듣는 이도 모두 현재에 닿아있는 과거의 이야기로 빠져들게 했다.
전쟁으로 인한 소실로 겨우 남아있는, 일부 기록의 파면만으로도 송광사의 역사 기록이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훌륭한 유산이 될 만큼 많은 기록이 현재 이 시간을 사는 이들에 의해 묻히지 않도록 하기 위한 고경 스님의 노력이 역사를 밑거름으로 꽃 피우는 듯하다.
조계산송광사사고 : 산림부 이야기
송광(松廣). 소나무가 넓게 분포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과연 그랬을까? 해석의 여지는 많다. 광활하게 펼쳐진 활엽수림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바위 위에 유독 넓은 수관을 가진 한 소나무가 우뚝 솟아있어 유독 돋보였을 수도 있지 않은가? 생태학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송광사를 둘러싸고 있는 조계산 일대는 과거 소나무림이 발달했을 가능성은 없다. 넓은 소나무림은 이곳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도 얘기하지 않지만, 후자로 인해 불린 이름이라는 추정이 더 설득력이 높다. 기록은 그래서 중요하다.
송광사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숲에 대한 기록물인 『역주 조계산송광사사고 – 산림부』가 있다. 1931년, 송광사 대부분이 불타기 훨씬 이전에 작성되었으며, 먼 과거의 역사까지 모두 기록한 기록이기에 왜곡된 우리 사찰숲에 대한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이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 송광사의 숲속 산책길이 왜 이렇게까지 아름다운지를 여실히 증명하며 보여줌을 알 수 있다. 바로 가장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우리의 짧은 삶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송광사의 조계산이 품었던 ‘본디 모습’을 빠르게 회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절은 지금으로부터 730년 전 고려 명종 27년(1197)에 고승인 보조국사가 창건하여 여섯 번의 중창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건물 70여 동이 있는데 무엇보다도 희귀한 활엽수의 큰 목재를 사용하여 세운 것을 보아도 예전숲의 모습을 두루 살펴 알기가 어렵지 않다. 본 사업구역의 식물대는 난대 북부에 속하고 해발고도가 낮아 기후가 온난하면서 토질이 비
교적 비옥하여 상당히 많은 수종이 자란다. 대표적인 나무는 졸참나무, 떡갈나무, 황철나무, 단풍나무, 층층나무, 피나무 등의 활엽수와 적송이다. 현존 사찰의 건축재로서 사용되었지만 모든 활엽수가 수령이 오래되고 점차 남벌 되면서 침엽수가 침입하여 현재는 오히려 침엽수의 면적이 반 이상이 되었다. 본 사업구역은 1923년부터 벌채를 시작하여 지나치게 벌채하는 남벌이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숲의 모습이 점점 파괴되어 …… 활엽수는 점차 자취가 사라지면서 침엽수로 대체되는 중이다.
- 조영제・김탁・정용범・정미숙 역주, 『역주 조계산송광사사고 – 산림부』, 혜안, 2009.
이 기록을 쉽게 풀면, 과거 송광사 주변의 숲은 대부분 고목이 울창한 활엽수혼효림을 이루었는데, 오래된 활엽수들을 건축재나 기타 다른 용도로 사용하며 과도하게 벌목하면서 활엽수림이 소나무림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송광사를 둘러싸고 있는 숲은 활엽수림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7~1918년 작성된 1:25,000 지도에 의하면, 사찰 주변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사찰림이 활엽수림이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산림부에는 오래된 활엽수가 남벌되던 시점을 1923년 부터라고 정확히 기록하고 있으니, 그림으로 된 지도와 글로 된 책의 기록이 일치하는 것이다.
활엽수림이었던 이곳은 이후 짧은 시간 동안 격변을 거치게 되는데, 고경 스님께서 직접 한곳 한 곳 걸으며 조계산 전역을 조사하던 지도(1980년대 작성된 지도로 보인다)를 통해 대부분의 숲이 침엽수림(소나무림)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도 활엽수림으로 울창했던 수림대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빠르게 벌목이 되었고 전쟁을 거친 이후 대부분이 소나무림으로 변화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숲의 ‘본디 모습’은 넓은 소나무림인‘송광’이 아니었음을 말이다. 아픔의 역사로 인해 척박하게 변화된 숲이 80년대 송광사 주변을 에워싼 소나무림이었던 것이다.
천천히 성장하는 숲,
노숙한 아름다움을 위하여
이른 아침, 겨울 초입의 찬 공기를 맞으며 송광사의 숲으로 들어갔다. 숲길은 이곳 숲을 오랫동안 포행의 동반자로 삼아 온 박물관의 부관장 연옥스님께서 안내해 주셨다. 기실 송광사에 들어오는 입구와 주변의 숲은 자연 그 자체라기보다는 사람에 의해 여러 형태로 변형된, 그렇기에 무언가 어색함이 강하게 나타나는 그런 숲이다. 그래서 마음의 평온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자연이 만들어준 울창한 계곡수림대는 양안의 도로에 의해 원형을 상실했고, 군데군데 펼쳐지는 편백과 삼나무림은 아무리 첫 시작이 스님에 의한 자발적 식목이라 하더라도 역사적 의미가 더욱 빛나야 할 고찰의 이미지와는 한껏 벗어나 버렸음에 그렇다. 여기에 더해, 얼마 전 화재로 인한 대응책으로 진행된 수백 년의 고목수림대 벌목 현장은 더욱 마음을 무겁게 했다. 벌목이 빠르게 진행되었던 일제강점기와 전후 가난했을 당시에도 베어지지 않았던 나무들이었다. 삶의 지혜를 바탕으로 구전된 사찰의 전통 지식은 현대의 과학보다 훨씬 대단한 것들이 많다. 숲의 관리도 그러했는데, 현대 과학의 숲에 대한 단편적 몰이해가 결국이 오래된 숲을 없애는 데 활용되었기에 짓눌린 마음은 더욱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연옥 스님과 함께 들어선 숲에서는 앞선 불편함을 단박에 잊을 수 있는,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몰려오고 있었다. 스님께서도 숲에 들어온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이 숲은 입구의 계곡과는 달리 본래의 모습을 표현한 기록에서 볼수 있었던 숲이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다만, 그 크기가 조금 작을 뿐이었다. 송광사 숲의 기록에 있던, 숲을 이루는 “대표적인 나무는 졸참나무, 떡갈나무, 황철나무, 단풍나무, 층층나무, 피나무 등”에 더해 느티나무와 고로쇠나무, 노각나무, 다릅나무, 벚나무, 물푸레나무 등 이루 헤아릴 수없는 다양한 큰키나무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하늘 위로 달려가는 모습은 이 숲이 왜 아름다웠을지를 여실히 보여주고자 하는 듯했다. 잎을 달지 않은 겨울의 숲이 이렇게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다가오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겨울이라 더 아름다운 숲은 이런 숲을 말하는 것이리라.
100년 전 기록된 이 숲의 모습은 지금과는 다르다. 그때의 숲은 오랜 시간을 그 몸속에 켜켜이 쌓은 고목들이 펼치는 노숙미로 이루어진 숲이었다면, 지금은 싱그런 유년 시절을 뽐내기라도 하듯 거침없이 경쟁하면서 자라나는 나무들이 펼치는 건강미를 보여준다. 불과 40여 년 만에 과거의 훼손된 역사를 모두 지우고 스스로 자연미를 끌어올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깊이 간직하고 있던 흙과 물의 힘일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달리 말해 죽음이 앞에 있음을 의미한다. 산사에 큰스님이 계시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는 새롭게 공부를 시작한 스님들이 함께 하고 있음이다. 한국불교의 승맥을 잇는 승보종찰 송광사와 가장 어우러지는 숲이 이곳에 있다.
오랜 시간 한 자리에 우뚝 서서 물끄러미 관조하는 노목들이 사찰의 입구를 지키고 있고, 그 뒤로는 이렇게 새로운 역사를 만들면서 활발하게 자라나는 건강한 숲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연산봉을 종점으로 이어진 산행길 내내 이 젊고 건강한 아름다운 숲과의 만남은 그 어느 숲에서 마주할 수 없었던 기쁨이었다. 과거 훼손되었던 사찰숲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야 할지, 교본이 되는 숲이다. 마치 큰스님들을 바라보며 새롭게 공부에 매진하는 스님들처럼.
“성급하게 성과를 기대하고 그러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요. 차분하게 기다려주고 지원할 걸 지원해 주고 하다 보면 성과가 서서히 쌓여 어느 순간에는 기준 이상으로 성과도 나오고 발휘가 되거든요. 근데 너무 성급하게 하다 보면 졸작이 돼요. 중간에 꺾이고 말아요.”
고경 스님의 말씀이다. 스스로 경쟁하며 이제 갓 어린 티를 벗은 건강한 숲이 먼 미래에 노숙한 아름다움으로 이어질 때까지 우리는 그렇게 서서히 변하는 모습을 기다려주면 되리라. 그 기다림의 시간은 아직 수백 년이 남아있다. 산사에서의 하루, 성급함을 버리는 시간이다.
홍석환 부산대 조경학과 교수이자 환경·생태계획 분야의 전문가다. 숲의 생명력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숲의 역할을 깊이 고민해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 기후재난연구소 공동대표이자 조계종 환경위원회 위원, 영축총림 통도사 환경위원회 위원이다.
순천 송광사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100
061-755-5350